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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Mar 01. 2016

너와 나의 열정페이, 그래도 픽미업

서른,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013



많기도 하다. "픽미픽미 픽미업"을 외쳐대는 소녀들을 보라. 무려 101명의 어린 여자들이 화면에 잡히기 위해 픽미업 픽미업 노래를 한다. <프로듀스 101>, 논란의 여지는 관심이 된다.


'이런 걸 ... 왜...' 하면서 처음에는 인터넷에 올라오는 관련 기사에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다가 채널을 돌리던 중 호기심에 한 번, 어이없음에 한 번, 궁금증에 한 번 보게 된다. 어느새 우리 집 아저씨(아저씨라 쓰고 남편이라 읽는다)는 손수 투표까지 하게 되는데 ( ...) 우습게도 옆에 앉아 누구누구가 괜찮더라며 훈수 두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 이런 아저씨, 아줌마.




그녀들의 픽미픽미 픽미업이 몹시 필사적인 것처럼, 화려한 조명이 없는 일상을 사는 우리들의 픽미픽미도 그만큼 치열하다. 서른을 넘긴 나는 이제 취업시장에서도 알바시장에서도 인기 없는 인력이 되었다. 게다가 기혼, 거기에 아이도 있으니 대단한 슈퍼파워를 가지지 않은 이상 아마도 어렵겠지. 쉬운 게 하나 없는 우리네 인생은 졸업식과 도서관을 적막함으로 채우고 통장은 대출 빚으로, 친했던 친구와의 관계는 약간의 서먹함으로 채워간다. 이게 사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은 가슴 한편으로 미뤄두고, 그래도 빚을 덜어보고자 꽉꽉 채워쓰는 이력서와 자소서는 어느덧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채워진다. 솔직해져 보자 하며 써 내려간 '나'의 이야기에 '남들도 다 하는 노력인데..'라며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건 또 누구의 잘못이던가.


어찌어찌하여 어렵게 들어간 일터에서의 하루, 일주일, 한 달은 기가 막힌 열정페이를 요구한다. 살아 내는 게 신기할 정도로 어떻게든 버텨본다. 어렸을 적 부모님께 한 달에 얼마는 용돈을 드려야지 했는데,  용돈은커녕 부모님 돈 갖다 쓰지 않는 자식이 효자 효녀란다.


우리 엄마는 동생에게 용돈을 달라고 조르면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자필로 각서를 받아뒀다.

"나는 20세 이후에 엄마에게 매 달 50만 원씩 용돈을 주겠다"


그때는 물가가 오르는 만큼 우리들의 급여도 오를 것이라는 당연한 기대가 있었다. 이후 20년이 지나고  빛바랜 앨범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힌 메모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몰랐다. 20년 후에 50만 원이 이렇게 큰 돈일 줄. 월 수백만 원 벌 줄 알았는데 현실은 이백만 원 벌기도 버겁더라.





처음 건축을 전공하면서 설계를 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시작했다.  쓰디쓴 현실은 취업을  준비하면서부터 다가왔다. 큰 회사를 다녀야 연봉 2300, 2500. 그럭저럭 한 회사들은 1800. (돈 모아서 유럽 쪽으로 유학을 가볼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다른 게 판타지가 아니고 이것이 바로 판타지였다) 그래도 건축 쟁이를 꿈꾼다는  수많은 건축전공 졸업생들은 픽미를 외쳤다. 나도 그들 중 하나다. 설계를 업으로 삼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300:1의 처절한 경쟁을 끝으로 입사를 했다. 월급은 세후 130만 원. 써볼 돈이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돈 쓸 시간도 없었다. 매일 야근과 철야의 반복으로 딱히 문화생활을 위한 지출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밤낮없이 살고 있나'라는 회의가 들어 회사 생활은 아주 빠른 퇴사로 결말을 맞게 된다.




올 해도 다들 어렵다는 가운데 그래도 우리들의 '픽미'는 계속된다. 뉴스는 청년들이 마치 대기업만을 가기 위해서 취업 재수, 삼수를 한다고 이야기한다. 아니면 공무원이 되기 위해 오래 공부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전체가 그런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아니다. 이 길 아니면 다른 길이 없어서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급여에 고된 노동을 감행하는 청년들이 사실은 아주 많다.


말도 안 되는 현실을 탈출하는 방법은  하나뿐.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상관없이 사는  것뿐이다. 개인이 사회를 바꿀 수는 없으니 자급자족하는 것 밖에는 딱히 대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할고. 그래서 다시



픽미 픽미 픽미업



어쩔 수 없다는 걸 뻔히 아는 자본가에게 우리는 다시 픽미를  외칠뿐이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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