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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 Nov 14. 2020

너 왜 운동해? 즐거워? 행복해? 아니면 괴로워?

'want'와 'need'는 결국 공존한다.

언제부터인가 근력운동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이젠 심심찮게 공중파 방송에서도 헬스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많이 볼 수 있다. 과거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성행하던 작은 판이었던 헬스 업계가 이젠 거대 산업이 되었다. 애플힙, 식스팩, 탄탄한 바디와 많은 근육량을 가진 조각 같은 몸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 몸을 만들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이란 것을 하며 단백질 신화를 만들어 보충제와 닭가슴살을 먹으며 근손실에 벌벌 떨고 헬창이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현시점 굉장히 핫한 키워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역사상 없던 '디지털'시대와 맞물리게 되면서 고작해야 방송, 신문, 지역 범위 정도에서만 홍보가 가능하던 기존의 마케팅 방식은 인터넷을 통해 기하 급속도로 몇천 명에서 몇억 명까지도 노출시킬 수 있다. 하루에도 몇 천장씩 sns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핫바디 사진과 커뮤니티와 유튜브를 통해 운동에 대한 기사들, 이야기들은 직/간접적으로 우리의 의식에 스며든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몸짱을 위한 헬스산업 다이어트산업이란


자본주의는 각종 단백질 관련 음식들을 무자비하게 만들어 내며 마케팅을 펼치고, 뱃살 빼는 법, 팔뚝살 빼는 법, 골반 만드는 법, 등등을 들이밀며 우리의 기대와 환상을 산다. 별에 별 운동 기구와 아이템들을 만들어내며 되지도 않는 마케팅을 하고 얇은 허리를 위해서라며 코르셋까지도 하루 종일 착용하게 만든다. 바디 프로필이며 피트니스 대회는 헬스를 시작했다 하면 한 번쯤 권유하는 문화로 떠올랐고, 심지어 생물학적 한계를 수긍하지 못하여 스테로이드 문제까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인간의 욕심이란 이런 것이다. 본디 쉽고 빠른 것에 끌리게 되어 있다.


이런 현상의 공통점은 결국 기승전 외모다. 헬스를, 운동을 하는 것은 외모를 위해서라는 최종 목표를 깔고 모든 것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되도록 최대한 쉽고 빠른 방법을 들이밀며 우리를 자극한다.

왜냐면 제일 잘 팔리니깐, 제일 핫하니깐. 인간의 본능은 본디 우성 유전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수한 외모에 끌리는 것쯤이야 당연하고 어쨌든 태어났으면 내면과 함께 외모까지도 가꾸는 건 적극 지향한다. 타고 남은 어쩔 수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노력을 해보는 건 어떤 것이든 지당하다.


그러나, 왜 운동이 외모를 위해서만이 되어가고 있는지?
운동이 나를 위함인지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을 위함인지?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것은 인간의 특성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어도 홀로   없으며 사회를 형성하여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물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집단화 되며 집단에 참여하므로 인간은 타인과의 연대감, 사회적 정체성 등을 얻고 개인적 부담감을 덜어낸다. 집단은 '우리' '그들' 경계를 만들어 내고 그들을 평가절하하며 우리와 다른 그들를 향한  만들어낸다. 고로 사회라는 집단에 속한 우리는 '사회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향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속하지 못하면  대상이 된다.


이로 인해 많은 부작용이 생겼다. 대적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기준에 맞아떨어져야 한다.

자본주의가 좋아하는 인간의 쉽고 빠름을 원하는 습성은 무너지기도 쉽다. 본디 건물을 쌓아 올리 것 보다 무너뜨리는 게 더 쉽듯이 모든 파괴적인 건 빠르다. 과거 마르기만 하면 됐던 시대에서 이젠 탄탄함과 볼륨까지 요구하니 그저 덜 먹기만 해선 되지 않는다. 피트니스 대회에 나갈법한 바디빌딩식 식단과 운동법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요구되고 바디 프로필과 대회가 운동의 목표가 되어 버리는 현상도 심심찮게 보인다. 운동은 무조건 각 부위의 근육을 증가시키며 각 부위의 모양을 '만드는' 운동법이어야 하고, 탄수화물은 적이며 태어나 여태껏 먹어오던 일반적 밥/국/반찬을 베이스로 먹던 일반식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다. 무조건 하루 4끼, 닭가슴살 100g, 고구마 100g, 야채, 아몬드, 영양제는 국 룰이 되었다. (그러면서 입 터졌다면서 과자나 빵 가공식품은 무서운 줄 모르고 먹는다.) 이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식이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유례없이 활성화된 다이어트 제품들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


운동 또한 오직 몸을 만들기 위한 근력운동만을 고집하며,  뭘 해도 자극 점을 찾고 근육을 사용할 수 있는 근신경계 발달과 몸의 근골격계 움직임의 적응이 이루어진 숙련자들에게나 통하는 스킬을 각자 수준에 고려 없이 유튜브 등을 통해 전파시킨다. 희망에 부푼 헬린이는 그 '운동법'을 철석같이 믿으며 기초단계 따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그것부터 그대로 따라 한다. 그 결과는? 만성 부상 or 근골격 통증 당첨! 을 불러 올 확률이 높다. 실제로도 다친 사람을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아프다는 건 삶의 질을 와장창 떨어뜨린다.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해서 행하고 있는 현상인지, 사회가 만들어낸 현상에 나를 맞추기 위함인지?


사이 달



지금 그대들은 행복한가? 진짜 운동의 충만감을 느끼기 위해 운동을 하고 있는 건지, 진짜 음식의 기능적이고 풍요로운 영양을 얻기 위해 먹고 있는 건지. 내가 원해서인지 사회적 기준을 위해서 인지.


혹시나 피 땀 눈물의 시간을 보내고 얻은 몸이 계속하여 이렇게 먹고 이렇게 운동하지 않으면

결코 유지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고 좌절하고 있진 않은지, 타고남의 수혜로 예쁜 몸의 라인과 비율을 가진 그녀들의 골반 넓어지기, 개미허리 만들기 등의 '운동법'을 따라 하며 저렇게 될 수 있단 환상을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따라 하고 있진 않은지, 그렇게 하는 운동이 그저 칼로리를 태우고 그저 애플힙을 만들기 위함에 오늘도 억지로 하고 있진 않은지.


닭고야만 주구장창 먹다 터지는 입에 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울면서도 먹고 있진 않은지, 오로지 부위별 근육 증가와 몸을 만들기 위한 운동들만을 따라 하다 부상에 노출되어 있진 않은지, 아무리 노력해도 로니콜먼은 될 수 없는 팩트에 스테로이드의 유혹이 고민하고 있진 않는지.


무엇보다도 내 삶의 모든 것이 오로지 몸만들기에 맞춰져 좌지우지되고 있지 않은지. 행복해? 즐거워?




내가 하고 있는 행위들이 뭐든 간에 목표의식이 더 크고 그로 인해 얻는 것들이 더 행복하고 즐거우면 됐다. 그 개인의 선택엔 그 누구도 뭐라 할 순 없다. 그런데 문제는 아름다움을 위해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너무 힘들고 고통이라면, want를 위한 길은 지금 그 길 말고도 다양하게 있다. 내가 그 방법만을 고수하는 건 오로지 내가 경험하고 들은 그 방법뿐이라 그 방법 아닌 다른 방법을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개인은 다양하다. 각자 가지고 태어난 개성이 다 다르듯 인간의 약 206개의 뼈와 640개의 근육의 모양과 구조는 다 같지만 각자의 뼈와 근육들의 길이와 면적은 다르다. 각자의 근골격계의 가동성과 안정성, 정렬 그리고 근신경계 또한 다 다르다. 이것은 역학적으로 각기 다른 토크를 만들어내고, 각기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또한 몸은 정동 과정과 인지과정을 통해 음식에 대한 정보를 통합한다. 맛-피드백 관계를 통해 음식의 생소함, 음식에 든 영양소의 양, 그 영양소의 필요성까지 좌지우지한다. 고로 각자가 필요한 영양 또한 다르다. 영양이 제대로 돌아야 몸이 제대로 돌아간다.


이 말인즉, 나에게 필요한(need)것을 먼저 채워야 결국은 내가 원하는(want)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사고하고 판단한다. 보이는 것들에서 보이는(경험했던) 부분에만 집중하며, 그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일반화시킨다. 이것이 확인 편향의 오류이며, 고로 내가 해서 성공했던 방법이 전부이고, 내가 겪지 못한 부분은 간과하기 쉽다. 그래서 직접 겪기 전엔 모르는 거다. 결국 want를 위해선 need가 필요하다는 걸. 내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위해 나에게 '먼저' 필요한 운동과 영양이 있다. 또한 내가 인내할 수 있고 꾸준히 할 수 있으며 나에게 맞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하게 존재한다. 세상은 절대 이분법적일 수 없기에, 다양한 학문들은 각자의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어떤 관점에서든 꽤나 논리적이고 근거 있는 주장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 독단적인 아닌 결국은 연결된다.

내가 아는 모든것들을 깨부셔보자



부실공사로 쌓아 올린 건물은 결국엔 무너진다. 빠름을 위해 need를 무시하는 것은 설령 want를 얻었다 할지라도 결국 무너져 내린다. 욕심은 되돌아오는 화살이 되어 비수로 꽂힐 것이다. 고통은 성장이고 실패를 경험해야 함은 분명 필요하다 강력하게 느끼고 있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적 자아를 쌓아 올려 되고 싶은 내가 되어가기 위해 필요함이지 건강이 망가지는 경험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집단화 속에서 사회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운동을 하고 헌저히 떨어지는 영양 구성을 섭취하며 피로와 싸우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물리적 대미지를 받으면서 인간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건강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망칠 필요가 없다. 70억 인구의 개성(personality)이 다양하듯 각자가 원하는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을 위한 몸이, 뇌가 원하는 방식 또한 다양하다. 그리고 각자에 맞게 뒷받침해줄 방법들은 지금도 무한히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니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다. 사회적 기준을 위해 건강을 망칠 필요도 없다. 뭐든 완벽한 것 또한 없으며 곧 죽어도 시합용, 대회용 몸매를 유지하고 살아야겠단 게 아니라면, 그 완벽한 몸을 위해 내 건강쯤이야 어떻든 상관없는 게 아니라면, 100세 인생에 훨씬 긴 부분을 차지할 노년이 괴로운 것쯤 두렵지 않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10에서 2 정도만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의 합은 더 크단 걸 알게 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그를 위해 오로지 듣고 보는 대로 믿지 말고, 내가 경험한 단 하나의 방법만 파지 말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하고 쌓아 올려가자. 모든 가치 있는 것은 원래 어려운 법이다.  


겹겹이 쌓이는 자연처럼


나의 want를 위해 인내할 줄 알고 요행이 아닌 fm으로 need를 찾아 적용시켜 나가다 보면 외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모든 긍정적 요소인 체력, 지구력, 심폐력, 근골격계의 좋은 움직임, 만성 통증 탈출, 식단의 풍요로움, 자존감, 도파민으로 인한 충만감과 함께 삶의 질 향상 등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need 없인 want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결국엔 이 길이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다시 기억하자. WANT와 NEED는 공존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 속엔 FM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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