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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말티즈 Jun 14. 2021

유월의 햇살

2021.06.13 당진에서의 첫 산책

 최근 들어 날씨가 많이 더워졌다. 어릴 땐 더운지도 모르고 한여름에도 뛰놀곤 했었는데, 이제는 봄 햇살도 뜨거워 외출에 조심스럽다. 온난화로 기온이 높아진 탓일까, 아니면 햇살 하나에도 자외선을 따지는 어른이 되어서일까, 그마저도 아니면 더위를 견디기 힘들도록 실내에 적응해 온 나의 몸뚱이 때문일까. 당진으로 배치받고 두 달이 다 되어가서야 처음으로 용기 내어 산책을 나가보았다.


 오늘은 최고 기온 27도로 그리 덥지는 않은 날씨였다. 차를 타고 종종 다니던 길들이, 천천히 한발 한발 내딛다 보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귀여운 디저트 카페도 있었고, 맛집처럼 보이는 냉면집도 발견했다. 중국집엔 몇몇 아저씨들이 모여 앉아 낮술을 한잔하고 계셨고, 놀이터에서는 어린 자매와 어머니가 미끄럼틀을 타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당진에는 유난히 공원이 많았고, 시청 근처에는 나무가 빼곡히 자라 깊은 그늘을 형성한 공간도 있었다. 그 아래 벤치에 잠시 누워 눈을 감고 있자니 시원한 바람이 나를 반겨주었고, 바람을 타고 당진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당진에 온 이후로 적응에 꽤나 애를 먹었던 것 같다. 고향은 경남, 학교는 서울. 충남은 연고 하나 없는 생판 남인 지역이다. 게다가 학생의 신분에서 직장인이 되면서 달라진 것들이 참 많았다. 운전을 시작한 지 2주 만에 고라니를 박았고, 직장에서는 실수투성이 막내에 집에 돌아와서는 초보 요리사가 되어 어떻게 식비를 줄일지 고민을 한다. TV를 보며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여자 친구와 통화를 하면 하루가 끝나고 이내 다시 출근을 한다. 졸업 전엔 직장인이 부러웠는데, 요즘은 학생 때가 그리운 걸 보니 나도 참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분이 꿀꿀할 땐 바람을 쐬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이해되는 날이었다. 그늘에서 나와 다시 햇살을 맞으며 돌아오는 길,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에어프라이어를 사고 뭘 해 먹을까 고민하던 내게 이런저런 레시피를 알려주신다. 너무 어렵다며 머쓱하게 웃자 밥을 잘 먹어야 한다며 걱정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따듯하다. 전화를 끊고 여자 친구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첩을 열어본다. 우리의 밝은 표정이 눈부시다. 얼마 전 술에 취해 전화 왔던 대학 동기의 하소연이, 카톡으로 찡찡대던 나에게 전화 와서는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던 다른 동기의 마음이, 온기 가득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살다 보면 항상 호의적인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이용해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가치관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면박을 주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피하고 싶은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기도 하고, 흥미 없는 일을 맡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우울해지고, 부정적인 생각들에 잠식되기 마련이다. 점점 숨어 들어가게 되고, 혼자라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곁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평소 밝다고 자부했던 나였지만 최근 부쩍 빛을 바라보지 못했다. 어둠에 잠식되었던 나를 돌아보고 세상의 밝은 면들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유월의 햇살, 그 맑음에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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