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과거와 현재, 미래는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다. 그리고 연속된 우연이 만나 만들어내는 연결고리는 놀라우리만치 오래 기억 속에 남기도 한다. 진정 연관된 사건이 우연히 연속되는 것인지, 아니면 연관성 없는 두 사건 간에 나만의 고리를 살포시 걸어두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연한 사건들이 만나 우리는 하루의 의미를 완성한다.
2021년 10월 3일의 아침,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나는 3차로를 달리고 있었다. 곧 우회전을 해야 하기에 미리 탄 3차로였는데, 이내 거대한 트럭이 앞길을 가로막고 주차되어 있었다. 차선 변경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좌측 깜빡이만 켜고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으니, 한 차량이 속도를 죽이더니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먼저 가라고 신호하는 것 아닌가. 고맙다며 깜빡이를 몇 차례 켜준 나는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창문을 내리고 엄지를 치켜들고 말았다. 내 차선 지키기에도 벅찬 초보운전이지만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도로 위를 사람 냄새로 수놓을 수 있는 그 기회를.
집으로 돌아와 켠 TV에서는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이 흘러나왔다. 우연히도 이날은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출연했고, 나는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던 10년 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연결고리는 바로 유비라는 인물, 혹은 ‘인덕’이라는 그의 덕목이었다. 친구들이 관우나 조자룡, 때로는 제갈량에 열광할 때 나는 유비를 좋아했다. 삼국지를 영화로 만든다면 멋진 전투씬이나 분량은 확보하기 힘들만한 멋없는 인물이지만 그에게는 사람 냄새가 난다.
뜬금없이 10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맏언니이자 주장인 김연경 선수의 모습이 현대판 유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기 중에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박력 넘치는 리더, 일상에서는 후배들과 티격태격하는 친근한 동네 언니의 두 얼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명예와 인기를 모두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오른 그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랫사람을 누르려 들지 않고 존중하며 솔선수범한다. 심지어 때로는 만인의 놀림감이 되어 동생들을 하나로 묶어주기도 한다. 그녀가 풍기는 인덕에 팀원들이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힘이 여자배구팀을 하나로 만드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히틀러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들의 이미지가 잘못 입혀진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은 김연경 선수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날은 사람 냄새로 가득한 하루였다. 명품 향수보다 향기로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향기가 나는 하루. 하지만 이날이 그토록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일상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높은 자리에 군림하기 위해서 남을 깔아뭉개야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남에게 존경을 강요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로 다스리려 한다. 행동보다는 명령이, 겸손보다는 허영이, 배려보다는 욕심이 먼저인 시대다. 오늘이 지나 내일이 되면, 서로를 깎아내리는 공멸의 시대가 지나고 행동과 배려로 서로를 감화시키는 수많은 김연경이 살아가는 시대가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황된 사람 냄새를 취기에 날려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