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이 소 결핵병 검진을 위해 농장을 방문했다. 40여 마리를 사육하는 작은 농가였는데, 체구가 작은 소 한 마리가 축사를 벗어나 풀숲에 홀로 앉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농가에서는 소가 재산이므로 한 마리 한 마리 잘 클 수 있게 관리하기 때문에 축사 밖까지 쫓겨나는 소를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입식을 했는데 같은 칸 놈들이 자꾸 못살게 굴어서 결국 축사 밖에 묶어놨어요. 그런데도 성장을 제대로 못하네요.”
소들끼리 서열 싸움을 하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면 이후엔 큰 문제없이 평화가 유지된다. 끝까지 서열이 정해지지 않으면 보통 다른 칸으로 이동시킨다. 하지만 이 녀석에게는 굴복도, 평화로운 이주도 보장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주변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긴 녀석은 11개월이지만,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왜소한 몸으로 홀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한 친구가 떠올랐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여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다. 입학한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한 친구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았다. 기숙사에 몰래 간식을 숨겨두고 혼자 먹는다는 소문, 집이 잘 살아서 이기적이라는 소문, 잘난 척이 심하다는 소문 등 온갖 나쁜 소문이 그 친구의 주변에 모여들어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를 만들었다. 나 역시 소문을 믿고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말 한 번 나눠보지 않은 친구를 멀리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한 마디로 시작된 소문에 의하여.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며 그 친구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그 친구는 그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했고, 마침 한 자리가 남은 우리의 방에 부탁을 하러 찾아온 것이다. 많은 고민과 토론 끝에 우리는 그 친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를 둘러싼 소문은 그저 오해에 불과했다는 걸.
실상은 이러했다. 어느 날 친구의 부모님께서 대량의 과자를 보내주었다. 그날 저녁 그 친구는 호실 식구들과 과자를 나누어먹었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다른 호실의 친구들까지 몰려와 과자를 몽땅 해치워버렸던 것이다. 이에 그 친구는 남몰래 자물쇠를 채우게 되었다. 그 자물쇠가 친구들과의 관계에도 채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 말이다. 내성적이던 그 친구는 악의적인 소문에 반박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고등학생 시절을 외로움 속에 움츠려 보냈다.
비단 학생 때만의 일은 아닌 듯싶다.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무수한 소문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많은 부분을 소문으로 접하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문은 전해지는 입에 의해 과장되고, 왜곡되는 특성을 지녔다. 특히 뒷담화가 그러하다. 때로는 정말 개인의 잘못으로 시작되기도 하지만,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된 미움이 점점 자라나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감정의 골은 깊어지긴 쉬우나 메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요즘엔 누군가를 공격하는 말이 ‘디스’라는 문화로 유행인가 보다. 친근한 사이에서 농담 삼아 던지는 디스는 웃음을 자아내는 풍자나 해학에 가깝다. 하지만 무례함을 받아들일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혹은 상처를 들쑤시는 디스는 그저 비난일 뿐이다. 문제는 간혹 사람들이 디스가 무례하건, 상처를 주건 말건 받아들여야 쿨한 사람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디스를 받아주지 않고 화를 내는 상대방을 오히려 속이 좁다며 조롱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디스를 던진 사람은 상대방을 쿨하지 못한 사람으로, 디스를 받은 사람은 상대를 무례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이런 문화 때문일까, 지인들과의 짧은 대화에도 가벼운 디스는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뒷담화가 시작되고 소문으로 퍼지기도 한다. 굳이 그래야만 할까. 생각 없이 가볍게 던진 한 마디가 부풀어 언제 나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예쁜 것만 보고 예쁜 말만 담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왜 우리는 서로 미워하며 살아가야만 할까.
따돌림, 자살, 갑질… 우울한 뉴스가 연이어 나오는 날이면 문득 생각한다. 어쩌면 오늘 내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누군가를 세상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