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미술 전시회를 방문하기 위해 외출 했다. 과거에는 좋은 작품을 보러 다니겠다는 욕심으로 미술 전시회를 꽤 자주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남의 그림을 보러 다니는 일이 더이상 그렇게 재미가 나지 않았다. 그림 뿐만 아니라 영화 관람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는 너무 볼거리가 많아서인지 무언가를 나가서 관람한다는 것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는 집에서 비디오 테이프로 영화 한편 볼때도 목욕 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보았는데, 점점 볼거리가 늘어나고, 늘어나다 못해 범람하기 시작해서 결국 관람자체가 귀찮은 일이 되고 새로운 볼 거리에 대해 점점 무뎌지는 것 같다. '어디 나를 놀라게 해봐', '어디 나를 감동시켜봐' 하는 관객 특유의 거만함도 생긴 것 같다.
이러한 귀차니즘으로 묶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회에 무거운 엉덩이을 들어 걸음했던 것은 나의 고 미술품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서울의 한 유명 미술관에서 [조선민화전]이라고 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마침 한국의 동양화와 민화에 대해서 궁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방문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번 전시는 발걸음을 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유료 전시였음에도 돈이 아깝지 않았다. 방대한 양의 괄목할 만한 조선시대의 회화들이 한 자리에 집합한 전시였는데, 2시간을 꽉채워서 보아도, 시간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더 길게 볼까도 생각해보았으나, 그때즈음 이미 눈이 지쳐서 더 보는 것에 의미가 없었다. (이래서 나는 거대한 스케일의 전시보다는 작은 전시를 선호하는 편이다.)
눈길을 끄는 매우 섬세하고 유려한 작품들도 정말 많았지만, 결국 내 발길을 붙잡아 세우고 내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게 만드는 그림들은 이게 과연 화백의 그림일까 싶은 몇몇의 엉성한 그림들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그림들...
초등학생 조카의 그림보다 아주 약간 더 능숙한 그림체였다. 아쉽게도 그림의 설명란에는 이 그림이 누가 그린 것인지 화가에 대한 설명은 전무했다. 그린 이의 회화 솜씨가 원래 이렇게 미숙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스타일화를 해서 그린 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보면서 웃었고 편안했다. 또한 개중에는 그리다만 것 같은 그림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같은...
연꽃 부분은 연필로 대충 선을 그리다 만 느낌이고, 연잎의 가장자리는 검은색으로 진하게 선을 따다가 도중에 그만 둔것 같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왜 그리다 말았지?' 라는 생각보다는 정해진 상식을 깨고 자유롭게 긁적인 느낌이 멋져보였다. 미완성적인 느낌보다는 그 안에서 자체적인 완결성을 느꼈고, 그것이 전혀 어색해보이지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눈치보지 않고 넓은 화폭을 종횡무진하는 그 감각이 좋았다.
이런 그림을 언제 보았던가? 이런 자유로움을 언제 느껴봤던가?
학창시절 나 역시 자유롭게 종횡무진 낙서하듯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지 않았던가. 순전히 내 만족을 위해 그리던 그림. 다른 누구의 시선이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또는 팔기 위해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순전히 내 안의 기쁨을 위해 그리던 시절이...
그렇게 낙서같은 그림들을 그리던 10대 시절을 너머서, 20대, 30대 시절에 이르러서는 힘이 잔뜩 들어간 강렬한 그림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눈에 탁 들어오는 색채와 원숙하고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을 자랑하는 강렬한 그림들 말이다. 나 또한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애를 썼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리려고 하는 그림은 '좋은' 그림이라기 보다 다른 사람들 눈에 '완벽' 해 보이거나, 그도 안되면 '원만'해보이는 그림들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림을 '애를 써서' 그리려다보니 언젠가부터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재미가 없어졌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라는 사소한 편견이나 법칙에서 벗어나 소소해도 즐거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일견 '엉성'해보이는, 뭔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그림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앞에 잠시 서 있고 싶어진다. 이들은 나의 평범함과 부족함도 모두 이해해주고 받아줄 것만 같다. 조금 솔직해져도 될 것 같고.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그림들이 예전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시대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몇 초만에 매끄럽고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테크닉적으로 완벽한 그림이 주는 감동에는 한계가 있다. 질서 정연하고 빈틈없이 블링블링한 그림은 A.I가 더 잘 그리니까. 과거에 사진기가 처음 나왔을때, 미술계에서는 인상주의라는 화파가 나와서 예술이 또 다른 세계로 도약했듯이, 우리 시대에 출현한 인공지능은 현재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감각에 문을 열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단순히 멋지고 완벽한 그림이 아니라, 그림 속에 바로 그리는 사람의 마음이 느껴지는 그림. 그리는 자의 진정성, 그 사람만의 개성과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작품을 이 시대는 원하고 있다. 이런 그림을 그리려면 그리는 자 안에 바로 '나' 가 있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당연히 '나'인데, 내 안에 '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사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라기 보다는 다른 것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분명 '나'라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 속에 소용돌이 치고 있었던 것은 정작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어디선가 우연히 주어들은 소리일 수 도 있고, 남들이 좋아하고 열광하는 것에 나도 모르게 같이 떠밀려가고 있을 수도 있다. 주변의 요구에 나를 맞추기 바빠서 정작 나의 영혼은 희미해져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단순히 테크닉적으로 훌륭한 그림보다는 그리는 사람의 아우라와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림은 그리는 자의 에너지를 그대로 투영한다. 육체적인 에너지와 감정, 기분, 영성적인 측면까지 모두. 그림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과거에는 부족한 나를 가리려고 애를 써서 강렬한 그림을 그렸지만, 이제는 그 부족함까지 그대로 담아내는 솔직하고 바보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