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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by 아난


나는 꾸준함이 부족한 사람이다.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 열심히 생활계획을 짜도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사람인데, 이런 나도 일기장에 꾸준히 쓰는 이야기가 있다. 그건 다름아닌 '건강'에 대한 이야기다. 꾸준히 어디가 아프다는 이야기, 컨디션 난조에 관한 투덜거림이 적혀있다. 돌이켜보면 평생을 정말 골골대며 살았다. 최근에는 허리가 삐끗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오랜 기간 고생을 했는데 에너지 넘치는 건강이 없더라도, 그냥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진정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거동이 불편해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바닥에 있는 물건을 줍는 것조차 고역이라서 집 청소를 개운하게 하는 것도 힘들다.


지금껏 나는 여러가지 건강 문제를 안고 가고 있지만, 혁신적으로 내 자신을 바꾸지는 못했다. 건강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기에 여전히 내가 편하다고 느끼는 낡은 습에 의해 끌려다니는 중이다. 한심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의 건강과 삶을 과감하게 바꾼 사람들이 부럽다. 예를 들면 [마녀체력]의 저자 이영미씨 같은 사람들 말이다. 저질체력의 소유자가 꾸준한 운동으로 결국 철인 3종경기까지 나아가는 이야기가 책에 담겨있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나 역시 건강한 체력을 갖고자 운동을 시작했는데, 조금만 무리를 해도 쉽게 다치는 스타일이라 이제 격렬한 운동을 하는데는 겁이 먼저 나는 것 같다. 조금 느리더라도 꾸준하게만 할 수 있다면 감사할 것 같다.


이런 프로 작심삼일러인 나도 최근 좋은 건강 습관을 하나 생활에 장착시키는데 성공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소금물' 마시기이다. (역시 먹는 건 쉽다.) 아침에 일어나서 따뜻한 물에 소금을 타서 마시는 것이다. 소금물 마시기는 우리 몸의 정화 작용을 돕고, 전해질의 균형을 맞추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빈 용기에 소금을 적당량 타고, 찬물과 뜨거운 물을 반반씩 타서 미지근하게 만들어서 먹는다. 솔직히 이것으로 내 몸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닝 커피보다 젠틀하면서 깨끗한 느낌으로 몸에 다가온다는 것은 알것 같다.



다이어트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삶이 왜 소중한지,
내 삶과 몸 자체의 소중함에 대해서 각성해야 한다.

-다이어트 과학자 최겸


이제껏 프로 작심삼일러였던 이유는 단순히 건강을 위한 건강습관, 일을 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고자 하는 욕심이 전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밭을 가는 쟁기를 끄는 소를 어서 빨리 움직이기 위해 채찍질하며 애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 이전에 내 삶이 정말 소중한지, 정말 그렇다고 내 스스로 느끼고 있는지 성찰해본적이 별로 없다. 다들 소중하다고 말하니까, 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들 하니까 그려려니 하고 따라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머리로는 알아도 실감한 경우는 드물었다.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만큼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는 몸이 있는 존재들이지만, 일상 속에서 정말 자신의 몸을 제대로 실감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몸이 통증으로 신호를 보내야만 성가신 눈길을 보낼 뿐이지, 평소 몸의 섬세한 속삭임에는 귀기울이지 못한다. 그러기엔 우리는 너무 바쁘지 않은가. 마치 머리만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머릿속의 여러가지 안건과 미래에 대한 욕망과 불안에 휩쓸려 다니느라, 몸이 있어도 감지하지 못한다. 머리처럼 부산하게 돌아다니지 않고 우직하게 이 순간에 현존하고 있는 나의 몸을. 그래서 건강을 챙긴다는 것은 단순히 몸에 좋은 무언가를 먹는 것, 운동하는 것을 넘어서서 매 순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 나의 몸을 자각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몸을 자각하기 위한 첫 단추는 호흡이다. 들어오고 나아가는 숨을 느끼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그리고 나서 몸의 구석구석을 감지해보는 것인데, 이러한 행위를 바디 스캔 (Body Scan)이라는 전문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밥이 나오지도 않고 떡이 나오지도 않은 이러한 행위, 소위 명상적 행위들이 현대에 들어와 니즈가 높아져가고 있다. 그만큼 혼을 빼놓을 정도로 변화가 극심하고 부산한 삶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20대 아이돌 가수가 마음 건강을 챙기기 위해 명상을 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가수의 사생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 어린 사람이 원래부터 마음 공부에 관심있을만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추측건데, 촉각을 다투는 삶에서 명상을 통해서 자신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오늘날의 삶은 복잡다단하며 그 안에서 쉽게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몸에 대한 감각을 잊기 쉬운 상황이다. 명상, 바디 스캔과 같이 목표없는 텅 비어있는 행위들은 더이상 시간 많은 사람들이 여유 부리는 일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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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명상을 생활화 하지는 못했지만, 최근 노력하는 바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다. 밥을 식탁에서 먹지 어디서 먹냐?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내 경우 나의 식탁은 책상인 경우가 많았다. 책상에서 모니터 앞에 앉아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밥을 먹는 것이다. 그런 내가 최근 노력하는 바가 바로 '식탁에서 밥 먹기'다. 인터넷 기사나 영상물을 보며 우물우물, 먹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식사를 하다보면 밥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게 되고, 나의 몸을 감지하기는 커녕, 음식의 맛도 제대로 느끼기 힘들다. 또한 인터넷 컨텐츠가 매순간 내 삶의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오로지 식사에 집중할 틈도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참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다. 식사량을 줄이는 다이어트가 힘들다면 적어도 '제정신으로 먹자' 라는 것이 내 의도였다. 그런데 이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손이 자꾸 TV 리모컨으로 가려고 하고, 휴대폰을 집어들려고 한다. 어쩌다가 이 정도로 나 자신과 오롯히 앉아 있는 시간을 어색하게 여기게 된 것일까.


사실 밥 먹는 시간을 별달리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냥 다른 활동을 위해서 먹어야 하는 지나가는 시간일뿐였을 뿐. 미식가도 아닌 내가 음식을 깊이 음미하고 제대로 느껴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 역시 내 삶의 소중한 시간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식사를 했던 순간을 담은 그림이다. 흥미롭게도 이 그림이 걸렸던 장소 역시 성당 수도원의 식당이었다. 예수는 열두 제자와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며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가 누구를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인지 몰라서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주님, 그럴리가요.', '설마 저는 아니지요?' 하면서. 오로지 유다만이 속으로 화들짝 놀라서 뻣뻣하게 굳은 체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참고로 유다는 예수의 왼쪽에서 세번째 인물이다. 식탁 위으로 한쪽 팔을 기대고 비스듬히 몸을 뒤로 젖힌채 앉아 있는 파란 옷의 사나이다.) 그림을 통해 우리는 식사 시간 도중에 행해진 성스러운 예언으로 한바탕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성경에서 나오는 비극적인 이야기는 차지하고, 이 그림을 바라보며 나는 종종 감미로운 상상에 젖을 때가 있었다. 예수와 함께 하는 식사시간이라... 어떤 느낌일까. 놀라운 영적 현존감을 가진 인물과 함께 하는,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열두 사도와의 식사 시간은 어떤 느낌일까. 어떤 내음이 느껴질까.


우연히 정신적인 수련이나,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거나 차를 마실때는 그 장소와 시간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뭐랄까, 굳이 그것을 정의하는 단어를 애써 찾아보자면 무언가 '고양'된 것 같은 분위기랄까. 음식을 먹는데 집중은 하지만, 음식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 순간이 그냥 너무 투명하고 생생하게 살아있을 뿐이다. 그 안에서 내 심장은 기분 좋게 뛴다.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 그림을 보며, 나는 상상에서라도 예수라는 거대한 인물과 함께 식사를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예수 앞에 앉은 나도 왠지 거인이 된 느낌일 것이다. 그러한 선각자들은 상대의 가장 고결한 가능성의 차원을 끄집어 내는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인물과 함께라면 휴대폰 따위는 손에 들어보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이다. 현존이라는 것이 그렇게 강렬한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식사를 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사실 내게 주어진 모든 장소와 시간은 그 자체로 텅빈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된다. 그것을 예수와 함께 하는 것처럼 성스럽게 만드는 것도, 불필요한 인터넷 기사나 쇼츠를 보면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찍어내듯 똑같은 일상을 만들어 내는 것도 결국은 나의 선택이다.


사원에서 기도하거나 명상하는 시간만큼 일상 속의 식사 시간, 교통 이동 시간 모두 우리 삶에서 반복되는 소중한 시간들이며, 그 시간들이 우리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적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 순간들을 나름 의미있게 빚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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