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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지간 06.

내 멋대로 아트 에세이

by 아난


선생님께서는 자상하셨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누구보다 단호하신 분이었다. 학생들에게 단순히 그림만이 아닌 예의범절이나 사람의 도리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분이기도 하다. 가족과 함께 이민을 왔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부모님은 결국 한국으로 귀국하셨고 나와 동생만이 남아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우리 남매에게 선생님은 부모님이나 다름없었다.


선생님께서는 예민한 시선으로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고 학생들을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나 역시 내가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이나 무언가를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냥 멍하게 앉아 있다 보면 무심코 지나가는 3분, 5분이라는 시간 안에 생명을 창조하듯 금세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시간인지 몸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고 종종 회의감을 느끼는 지금과는 다르게 그 시절엔 나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많이 쓰지 않던 오일 파스텔(크레파스)과 파스텔을 적극 이용해서 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어린아이들 작품처럼 보이는 그림도 많이 그렸다. 한국에선 가끔 낙서할 때만 빼놓고 이런 그림을 대놓고 그려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는 이렇게 그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이런 미완의 낙서 같은 그림들을 들고 나와 학우들과 선생님 앞에서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해야 했다.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완성작도 아닌 허접한 그림을 가지고 나와 피드백(feedback)을 주고받아야 하는 이 상황이 꽤나 의아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피드백 시간은 매우 진지한 시간이었다. 그 어떤 그림이더라도 그린 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그림이 가진 비밀을 발견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허술하게만 보이던 그것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무언가가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은 심장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죽어있던 그 무언가가 갑자기 살아 숨 쉬는 느낌이랄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관심의 힘 혹은 예민한 관찰의 힘은 이렇듯 놀라운 것임을 배울 수 있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가진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분이셨다. 세상에서 멋지다고 하는 것보다는 각자가 이미 들고 있는 특성이 얼마나 유니크(unique)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늘 강조하셨다. 그 어떤 평범해 보이는 특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보석같이 다루셨다. '남의 집 떡을 보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라.',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 등등 이는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선생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다.


그래서 같은 수업에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학우들의 접근방식과 표현방법이 정말 가지각색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베이킹(baking)에 관심이 많았던 친구가 만들어 온 작품인데, 직접 구운 빵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 왔던 작품이다. 선생님은 경탄을 하셨고 학우들도 모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에 남지 않은 이 학우는 평소에는 아주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어떤 재주나 끼가 강한 느낌은 없었지만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고 숙제도 늘 꼬박꼬박 해왔다. 선생님은 이런 성실성을 가장 높게 평가하셨다. 재주와 천재성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나는 이런 꾸준함과 성실함이 꽤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Artist Studio, pencil on paper

이때만 해도 지금은 흔한 ‘인성교육’이라는 단어가 아직 쓰이지 않았을 때다. 선생님께서는 당신만의 마법 같은 방법으로 들뜨고 흔들리기 쉬운 10대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셨다. 늘 그림 공부에 앞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인품과 태도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 단순히 미대 입시를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 거기엔 항상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난 종종 어머니와 다툴 때면 가출을 해서 선생님 집으로 가서 살 거라고 반항하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께선 '선생님이 널 받아주신다던?' 하면서 혀를 차셨던 게 떠오른다. 그때의 나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자상하시고 날 좋아하시니까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어머니께서 그때 날 말리신 게 다행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지만 난 그 정도로 선생님을 신뢰하고 있었다. 매일 밤 선생님께 나의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하고 이것저것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혼자 꽤나 긴 편지글을 쓰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누굴 만났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편지를 실제 전한 적은 없다. 밤에 써 내려간 그 감성적인 편지들은 대게 아침에 일어나면 엄청 유치하고 닭살 돋는 편지로 바뀌어 있으니.)


난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 아이였다. 실제로 말을 많이 하고 살진 않았지만 내 이야기를 모두 다 들어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늘 있었다. 상대방이 날 좋아만 해준다면...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준다면...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그때의 나는 선생님께 모든 이야기를 숨김없이 다 털어놓을 수 있었다. 선생님 앞에서 울기도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았고 선생님은 여린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다. 선생님은 강하고 때에 따라서는 매우 엄격한 분이었지만 가장 자상한 경청자이기도 했다. 늘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자신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굉장한 아군을 얻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어린 시절엔 더욱 그러하다.


지금까지도 선생님과의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97년도부터이니 20년 넘게 인연이 이어져온 셈이다. 이렇게 인연이 이어져 나갈지는 그때 처음 선생님의 화실에 발을 디딜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인연이란 정말 있는 건가 보다.


다만 이제는 나이가 들면서 나만의 생각과 관점이 생겨서인지 그때만큼 선생님께 나의 모든 이야기를 가감 없이 털어놓기는 어려워졌다. 솔직하게 말하기보다는 자꾸 눈치를 보고 계산을 하게 된다. 난 영악해진 것일까? 그렇게 냉담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일까?


속으로만 끙끙 앓던 이런 고민을 동료에게 털어놓으니 그녀는 내가 여전히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이 관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성장한다는 건 그런 거라고. 한 사람이 성인이 되면 관계의 변화도 당연한 거고 생각이 다를 수도 있으니 무언가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지 말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자신답게 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해주는 거였다. Be yourself.


그래도 되는 거구나. 그래도 되는 거였어...


선생님께 죄송하고 찔리는 마음을 접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이라는 것은 결국 이런 조율 과정의 연속 아닐까 싶다. 정말 뜻과 마음이 일치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결국은 어떻게든 크고 작은 견해 차이가 있으며 좋은 관계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유지시키는 힘이 있을 뿐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든,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의 관계든, 부부관계든, 친구관계든, 상사와 직원의 관계든, 부모 자식 관계이던 간 우리는 매일같이 그 관계라는 어려운 함수를 풀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평화를 논하기 전에 이런 작은 관계들의 딜레마를 하나씩 꺼내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인 것 같다. 그것을 통해 상대는 물론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조금 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화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생기는 일들은 이렇듯 비단 그림에 대한 것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니 얼마나 자기 생각이 강하고 기 센 사람들이 이겠는가? 우리는 그 안에서 화합하고 때론 대립하며 인생 공부를 톡톡히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게 그림 공부보다 깊고 어려운 공부이기도 하다.



Still Life, oil pastel on paper












유리병과 꽃이 놓인 정물화, 그 멀리 선생님의

서재가 배경으로 보인다. 저 분홍색 소파에 앉아서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지혜와 사랑으로 날 채워 주셨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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