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몽 연대기(13)
개발자 커플이었다가, 부부가 됐다. 남편은 지금도 개발자고, 나는 6년 전에 그만둔 전직 개발자다.
열세 번째 이야기 :
IT개발자 노동조합 총연합회가 없는 이유
농담 같은, 그냥 하는 이야기
웃자고 하던 이야기 중에 하나가 바로 "왜 개발자 노조 총연합회는 없을까?"였다. 각자 의견을 내다가, 누군가 결정적인 이야기를 했다.
개발자 노조는 있을 수 있어요. 그리고 모여서 한 목소리 내고 싶고. 그런데 모이기로 한 날이 하필 '데드라인'날이면 못 가잖아요. 그날까지 해야 할 일 있는데, 가긴 어딜 가요. 그러고 모였는데, 갑자기 장애 터지 졌다고 전화 오면 바로 달려가야 하잖아요. 그러니 뭐가 되겠어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그러네. 마감날이나 서비스 장애 터지면 진짜 답이 없지.
개발자 부부, 개발자 부모님
가능했을까?
개발자 부부를 별로 본 적이 없다. 보통은 다른 직종의 사람과 결혼을 했다. 개발자 부부도 별로 못 봤지만, 거기다가 아이를 키우는 개발자 부부는 거의 못 봤다. 내가 한창 일할 땐 그랬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으니.. 다르겠지만.
개발 일정 맞추려면, 모든 사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야근, 주말, 연휴 근무 등... 그리고 만약 장애가 터지면, 서비스 엔지니어가 아니어도 내 영역이면 밤이고 낮이고 전화를 받거나 연락을 받아야 했다.
예전엔 미혼이라 그게 가능했고, 결혼 후엔 아이가 없으니 가능했다. 그렇지만 지금 같으면 가능할까? 요새 열감기가 유행이다. 다른 건 몰라도 열감기면 유치원에 보낼 수 없다. 집에서 돌봐야 한다. 그럴 경우, 결국 엄마가 봐야 한다. 개발자로 일하는 중인데, 한밤중에 서비스 장애가 생긴다면? 그런데 아빠도 야근 중이면.. 그때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저런 게 모두 고려될만한 업무를 하고 있다면 모르는데.. 그러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려울 거 같다. 그리고 회식문화가 바뀌긴 했지만, 내가 회식 가야 하면 아이는 누가 보는가? 남편이 양보해 줄까? 그것도 미지수다.
이래저래 마침표를 찍었을 것 같다.
아니면 뭔가 다른 수를 내든가..
현재는 내가 은퇴 아닌 은퇴를 했으니, 덜 걱정하고 아이를 돌보고 있다. 그래도 한때는 끝까지 일할 것처럼 열심히 불태웠으니... 괜찮다.
남편은 현재 개발자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많이 힘들어 보인다. 어느 정도 힘이 드는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지만, 얼풋 느낌이 온다.
중간 허리 역할을 해야 하니, 개발일 보다 관리일이 더 많을 것이다. 당연히 회의가 많고, 식사나 회식, 원치 않는 접대자리도 있을 테고. 아빠도 힘든 그 자리에, 엄마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일은 어떻게 했을 텐데, 역할이 문제네. 일만 할 수 있는 편한 개발직이 있을까? 그런 자리는 없을 것 같다.
교육센터에서 만난, 완전 다른 성향의 우리
요새 한참 뜨는 영화 중에 <엘리멘탈>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는 것 같다. 라디오에 나온 영화평론가 말씀을 얼핏 들으니, 물과 불이 사람처럼 형상화되어 그려진다고 했다.
"서로 다른 건 끌리기 마련이죠."
맞다. 완전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서로가 궁금해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남 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얘기다. 필터 없이 필요한 말 바로바로 해버리는 남편과 좋은 게 좋은 거야 웬만하면 맞추자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듯하는 나는 딱 반대다.
맨날 싸우다가 정이 든, 우리는 교육센터 동기이자 첫 번째 직장 동료다. 나에게는 첫 번째 회사고, 남편에게는 개발자로서 첫 번째 회사에서 같이 일했다. 나보고 글 쓰는 사람이 멋지다더니.. 지금도 그런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자기보다 책 덜 읽었다고 구박했다. 점수 맞춰갔다니까.. 참.
둘이 너무 달라서, 서로를 맞춰가는 과정이 정말 대단했다. 그래도 같이 개발자라서 좋을 때도 있었다. 우선 남편이 나에게 프로그램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첫 데이트가 도서관 가서 프로그램 공부를 하는 거였다.
아무래도 많이 바쁘다 보니, 야근하다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주로 내가)이 회사 근처 가서 저녁 먹고, 편의점에서 커피 한잔 사서 마시다가 헤어졌다. 그게 데이트였다. 주말 데이트도 그런 식이었다.
바빠서 7년 동안 연애하다가 결혼했는데..
많이 바빠서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개발자라 바쁜 걸 이해해 주었고, 별로 불만이 없기도 했으니까. 대신 같은 쪽이다 보니, 뭔가 업무 얘길 하다가 남편이 저쪽 편 들어주면 꼭지가 돌아서 막 싸우다가 식식거리기 일쑤였다.
나중에 미국에서 일할 때는, 7년 반동안 같은 회사에서 등 돌리고 일했다. 남편과 같은 직장이라니! 그래도 하다 보니 할 만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할 때는 덕분에 더 많이 싸우고, 더 많이 지지해 줬다. 그리고 힘들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됐다.
각자의 회사와 가까운 곳을 찾다가,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오게 됐다.
전우애 동지로...
만난 지 27년, 결혼한 지 올해로 딱 20주년이다.
오래되긴 오래됐다. 미국서는 거의 24시간 함께 해서 대화할 시간이 많았는데, 한국에 오니 주중엔 얼굴 볼 시간이 거의 없다.
나는 그의 생활을 대충 짐작할 수 있지만, 그는 아마 전업육아맘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아차피 성향 자체도 달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는 듯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제는 서로 함께 한 시간 덕분에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대충 미루어 짐작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생겼다는 점이다. 연애 초기에 알콩달콩한 맛과 신혼 초기의 달콤 살벌함은 없지만, 같이 늙어가는 동지애가 생긴 것 같다. 큰 전투를 여러 번 함께 치른 전우. 나만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 없지만...
같은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다. 전생에 적의 적장(남편)과 전생에 그가 사랑했다는 연인(딸)과 함께 사는 장군(나)은 그래도, 매번 부딪히고 다투고 해도 현생에서 즐겁게 잘 살고 있다.
시계 건전지 다 바꿨다.
잔업 1부를 정리할 시간이다. 평온한 일상, 오늘 하루에 감사드리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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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첫 번째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