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몽 연대기(15)
미대 가고 싶었다고.. 어딘가 프로필에 적기도 했었지만, 과연 '정말' 미대를 가고 싶었나? 가 의심스러워진다. 한때 좋아 보였던 그림 그리기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
열다섯 번째 이야기 :
어느 날 문득 발견한 재능?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 같진 않다. 생각해 보니.. 중학교 입학하고, 담임선생님(미술 선생님)이 잘하는 것 같으니 미술 학원 가보라고 권하셔서 그런가? 했던 거 같다.
그런 거 있지 않나?
누군가 "너 이런 거 잘하는 거 같아! 재능 있어!" 하면, 진짜 그런가 싶어 솔깃해지는 것. 나에게 '미술'이 그랬던 것 같다...
라고 깨닫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진짜 잘하는 줄 알고,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미술학원을 등록했다. 한양대 학교 앞에서 비싼 그림도구를 샀다. 그리고 딱 한 달 다녔는데, 부모님이 반대를 하셔서 학원을 그만뒀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한번 해보면, 어렸을 때 예체능 학원은 얼마 안 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 땐가? 한 1년쯤 피아노 학원 다니다 말았고, 중학교 1학년 때 미술학원 한 달 다닌 게 전부다.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때 학교 특별활동으로 '서예반'에서 붓글씨를 배웠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집에서도 공부를 잘하는 게 최고였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는 잘하기 힘들었다. 적당히 혼나지 않을 정도만 했다. 왜 그랬을까. 싶은데... 한다고 해도 잘 안돼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게으른 게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언니와 남동생이 워낙 잘하다 보니, 어지간히 해서는 티도 안 났다.
하지만! 미술은 달랐다.
정말 달랐다. 초등학교 때 기억은 거의 없고,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의 미술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담임선생님이 "너 미술에 재능 있는 것 같아!"라고 말씀해 주신 다음부터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관심이 있다 보니, 정말로 열심히 하게 됐다. 그저 그렇고, 그냥 그렇던 내 삶에 한줄기 빛 같은 게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나도 뭔가 잘하는 게 있구나! 관심 갖고 열심히 하다 보니, 칭찬받고 더 잘하고 싶어 지는 게 생긴 셈이다. 어차피 부모님 반대로 일찌감치 포기를 했지만, 오랫동안 미련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쓸데없는 가정법 '만약에..'를 꺼내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만약에 말이야. 내가 미대를 갔다면. 아니 그때 그냥 그림 공부를 했다면.. 무엇을 하든 반드시 후회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참 오래오래 '만약에..'랑 살았다.
어렴풋이 현실을 깨닫다
개발자로 일하다 보니 디자이너들과 일을 같이 했다. 일하다 보니, 디자인의 영역은 개발자의 일보다 훨씬 더 느낌이나 주관적인 판단에 좌우가 됐다.
내가 보기엔 시안 1과 시안 2가 다 좋아 보이는데, 상사나 대표님 또는 심하면 업체가 원하는 모양이나 색감으로 시안이 선택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최악의 상황은 원하는 대로 해서 구현하다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시안이 더 좋았다며 수정을 요청할 때였다.
디자인은 아무래도 예술적인 부분이랑 관련 있을 텐데. 저 디자이너 저렇게 여러 번 바꿔도 기분 괜찮나? 지켜보는 개발자가 혀를 찰 때도 있었다. 나야 넘어온 대로 작업하는 건데.. 기분 나쁘겠다.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런 일적인 부분은 둘째 치고, 디자이너들이 개발자보다 연봉이 많이 적었다. 게임회사에 스타급 디자이너면 모르겠지만... 내가 그림 그리기 좋아한다 쳐도, 전공을 뭘 했을까? 돈 잘 버는 쪽으로 했을까? 아니면 별로 돈도 안 되는 순수 미술 쪽으로 했을까?
미국에서 일할 때, 유학온 학생들의 학비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미대 쪽 이야기를 듣고는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엄마 말대로, 미술도 집에 돈이 있어야 하는 거다. 나중에 미술학원 차려줄 정도의 돈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게 맞았을 거다.
남편 회사 동료의 어머님이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하신다기에 덕분에 그림 전시회를 보러 갔다. 건물 하나에서 여러 전시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벽걸이 포스터를 유심히 보니, 낮은 층에서 높은 층으로 올라갈수록 전시회 하는 같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1층은' 개인 전시회'를 3 군데서 하고, 4층에서는 여럿이서 함께 전시회를 하는 식이었다.
예술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드는 게 분명하다.
그래. 그래도 뭘 하면서 살았든 잘 살았으니까 괜찮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어쨌든 획득한 미술력의 쓸모
잘한다 소리에 힘이 나서, 중고등학교 때 열심히 또 열심히, 진짜 열심히 미술 시간에 만들고 그리기를 했다. 관심 없는 체육과 달리, 이건 진짜 내 세상 같았다. 일부러 하라고 했으면 그러지 못했을 거다. 뭘 하나 만드는데, 생각도 많이 하고 매번 정성스럽게 만들고 그렸다. 그런다고 뭐가 되거나, 그걸로 뭘 할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평소에는 깊은 동굴 속에 깊이 들어가 살다가 딱 미술시간이 되면 후다닥 뛰쳐나오는 사람 같았다. 잠도 덜 자면서, 밤에 만들고 그리고 하는 과정을 즐겼다.
덕분에 '미술력'을 얻은 것 같다.
이렇게 얻어진 미술력은 사는데 도움이 됐다.
사진을 찍거나 물건을 배치할 때 내가 해놓고도 뿌듯하다. 사진 잘 찍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많이 찍다 보면 그중에 건질 게 있다. 뭘 만들거나 그려야 할 때도 도움이 된다.
전에 웹사이트 개발할 때, 급하면 색깔 조합하거나 화면 살짝 바꾸거나 할 때 미술력이 도움이 됐다. 이래서 또 그때 열심히 했었구나. 뭐든 다 도움이 되는군. 하면서 뿌듯했다. 문서를 작성하거나 정리할 때도 도움이 됐다. 보기 좋은 게 아무래도 더 좋아 보인다!
엄마가 되니, 만들거나 그리는 걸 할 일이 많아졌다. 이리 갖고 와. 엄마가 만들어줄게! 스스로도 뿌듯하지만, 아이가 조그만 손으로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하면 정말 뿌듯하다.
글 쓸 때도 도움이 된다. 뭔가를 묘사할 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림이나 만들기는 머릿속 생각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고, 글은 누군가 읽으면서 상상이 되도록 쓰는 것이니까.
잘해서 잘하게 된다기보다, 잘한다/ 재능 있다는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아 열심히 하다 보니 잘하게 되나 보다. 내가 하는 일들을, 이왕 할 거면 대충 하지 말고 관심을 갖고 잘해보려고 한다.
원글 링크 :
저의 첫 번째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