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갑니다(5)
집안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정리하는 동안, 사람이 아니라 '로봇'으로 살기로 했다. 가져갈 물건과 버릴 물건을 분리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정리를 하다 보니, 뜻밖의 물건들을 발견한다. 이건.. 유물이네.
'정리봇'이 되다.
모든 게 마음 때문인 거 같아서, 잠시 모든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생각과 감정, 심지어는 마음도 잠시 멈추고 로봇이 되기로 했다. 가져갈 물건과 버릴 물건을 분리하는 '정리봇'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랬더니, 의외로 진도가 팍팍 잘 나간다.
역시 생각들이 문제였나 보다. (좀 일찍 정리를 시작할걸.. /같이 정리하면 좋을 텐데. /이거 다 정리할 수 있을까? /못하면 어쩌지? /이사 가서도 내가 다시 정리해야 할 텐데.. 며칠 걸릴까? /너무 힘들다. /진짜 화난다. /짜증 난다 등등등...)의 생각들을 멈추고, 그냥 정리에 집중했다. 생각할수록 나만 힘들었다. 이왕 하는 거 '그냥'하는 게 도움이 됐다.
늘 해야 하는 집안일(청소, 빨래하고/ 널고/ 개고/ 넣고, 설거지와 그릇 넣기, 쓰레기 버리기, 장보기와 물건 사기, 택배 정리 등등)은 정리하는 일 중간중간에 대충 하고 있다. 못하다가 아이 하원하고 몰아서 하기도 한다. 아이에게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비상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밥이 문제긴 하다. 혼자 먹는 점심밥을 대충 먹은 지는 꽤 됐는데, 뭐라도 먹는 게 다행이다 싶다. 아이와 먹는 저녁밥도 진짜 대충 얼렁뚱땅.. 그래도 뭔가 해서 먹긴 먹는다. 저녁밥 해야 할 때가 제일 늘어져서 힘들다.
이후 아이 씻기고, 10분 공부하고, 책 읽어주고 재우면 고된 하루가 끝난다. 재우면서 나도 같이 잠이 든다. 자다가 눈을 번쩍 뜨면 이렇게 아침이다. 그래도 다행히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서, 몇 자라도 쓸 수 있다.
정리봇 생활하면서 스마트폰을 중간에 덜 보게 됐다. 문자 확인 등 짧게 머무는 정도다. 유튜브 보면서 시간이 많이 날아간 거 같아서 좀 그랬다. 스마트폰만 덜 봐도 시간이 많이 절약될 텐데..
뜻밖의 물건을 발견하는 기쁨
정리봇 생활이 건조하긴 하지만, 뜻밖의 물건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네! 하면서 그 물건을 사용하던 시절도 생각난다. 이렇게 오래된 물건이 창고 한쪽에 살고 있었구나.
가져갈 수 없어 버리고는 있지만, 덕분에 옛날 생각이 나서 좋다. 얼마나 더 버려야 할지, 그리고 과연 다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는 동안 뜻밖의 추억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봇도 추억여행을 하는구나. 이런..
아이 보여주려고 꺼내놓은 물건이 다시 사라진다. 아이가 아끼던 장난감들을 버리거나 정리해야 해서 미안하다. 이사 가면 수납공간이 많이 줄어들어서이기도 하고, 물건에 유통기한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아가 때 잘 가지고 놀던 것들이 참 예쁘게 느껴졌다.
내일은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날이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데, 비 오기 전에 부지런히 가져다가 버려야겠다. 내일도 엄청난 체력전이 예상된다. 이사가 보통일이 아니다.
원글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