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던 회사에서 처음으로 폴리아티스트와 독립한 그날은
푸른 하늘이 평소보다 높게 빌딩위에 걸쳐진 어느 가을날이었다.
새로운 시작의 설렘과 이유 모를 긴장감 탓인지 그때 코에 닿는 가을아침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작은 지하실, 한때 트로트 가수들의 연습실로 쓰였다는 그곳은
커다란 전신 유리거울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고
두서없이 촌스러운 무늬 모습을 한 바닥과 콘푸로스트를 생각나게 하는 오돌토돌한 벽
그리고 하얗지도 노랗지도 않은 애매한 벽 색깔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용서되었던 이유는 우리만의 ’첫 작업실‘ 이기 때문이었다.
많고 많은 페인트색 중에 하나를 직접 골라 벽과 바닥 천장을 꼼꼼히 칠하고, 전등도 새로 달았다.
네모난 폴리부스에 각자 가져온 물건들로 꼼꼼히 채워 넣고 조금씩 장비도 구입하여 그럴듯한 녹음실을 만들어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미를 여럿 붙여 정을 붙여보려 해도 맘에 안 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냄새와 화장실이었다.
건물이 오래되고 통풍이 잘 안 되는 지하 인지라 특유의 건물 냄새가 났고, 알뜰한 주인아저씨는 비싼 월세에 비해 건물관리를 해주지 않은 탓에 설상가상으로 지하펌프가 고장 나 물이 새는 일이 발생했다.
고약한 냄새가 작업실을 타고 끊임없이 침범한 그때의 찜찜함은 아직도 생각하면 영 기분이 별로다.
화장실은 작업실을 나와 건물 한층 위에 있었는데 낡기도 낡았고, 남녀공용에, 단독으로 쓰는 것이 아닌 여러 사람들과 같이 사용하는 것이 늘 불편했다.
볼일에 집중할 수도 없고 아무튼, 특히 밤늦게 화장실 가는 게 참 무섭고 신경이 쓰였는데
공포영화나 스릴러 영화를 작업하는 날이면 그날은 화장실을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첫 작업실을 뒤로하고 두 번째 작업실을 구할 때 폴리아티스트와 난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화장실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다행히 단독 화장실이 있는 지금의 작업실에서 쾌적하게 일하고 있다.
화장실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폴리에 있어도 참 중요하다.
특히 물이 나오는 장면은 커다란 대야에 물을 가득 담고 폴리아티스트가 직접 물을 휘저으며 소리를 내는데 가까운 화장실 덕분에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하여 물을 채워 넣는 게 수월해졌다. (전 작업실에선 온갖 통을 동원해 몇 번이고 층을 오르내리며 물을 받았는데 이건 나중에 다른 글에서 한번 더 이야기해 보겠다.)
그런데 폴리부스를 화장실 가까이 짓다 보니 화장실까지 가는 길은 조금 멀다. 아니, 멀게 느껴진다.
내가 일하는 공간인 컨트롤룸 (장비를 통해 소리녹음을 받는 곳)에서 화장실을 가려면
먼저 컨트롤룸의 입구문을 열고 로비로 나가야 한다.
오른쪽에 또 다른 방음문이 보이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거긴 폴리룸으로 가는 복도다.
그 복도를 따라 쭉 걸으면, 왼쪽에 화장실이 보이는데 방음문을 열어야 화장실문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리 넓지 않은 작업실에서 화장실을 가려면 자그마치 4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스튜디오의 기본은 방음이다. 그러다 보니 문을 여러 개 달게 되었고 화장실에도 방음문을 여닫는다.
처음엔 일반적이지 않은 인테리어에 화가 난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화장실 문 앞에 달린 방음문은 꽤나 든든하다.
밖에 소리가 새어나갈 걱정 없이 언제든 맘 놓고 미션클리어가 가능하기에.
화장실이 멀게 느껴지는 건 단순히 문 때문만은 아니다.
폴리부스에 자리하지 못하고 넘쳐난 물건들이 하나둘 모여 바닥도 모자라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일 때면 그때마다 숨을 스-읍하고 참는다.
물건 틈 사이로 지나가기 위해서다.
다행히 점심을 먹기 전이라 쉽게 지나갈 수 있었지만 그다음이 문제다.
폴리아티스트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쇠 발판이 화장실 문을 막고 있는 것이다.
혼자 꼼짝도 하지 않는 발판과 낑낑거리며 씨름하다 결국 도움을 청해 화장실로 갈 수 있었다.
‘휴, 화장실 가는 길이 참 멀다.’
화장실 갈 때마다 귀찮은 순간들을 마주할 때면 첫 작업실 화장실을 떠올리곤 한다.
성큼성큼 내딛을 수 있는 그때의 화장실보단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걷는 지금의 화장실이 좋다.
문이 한 개인 그때의 화장실보단
문이 4개인 지금의 화장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