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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나 Jul 19. 2023

납량특집

녹음실에서 일하게 될 줄 전혀 꿈에도 상상 못 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일명 ‘갑툭튀’(갑자기 튀어나옴) 보는 것에 자신 없음은 물론, 대부분의 공포영화에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훨씬 많은, 본편 시청보다는 예고편을 보고 만족하는 쫄보, 겁쟁이었다.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공포영화를 잘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틀린듯했다. 

지금의 나에게도 공포영화는 크나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인생에도 적용이 되는 건지, 그동안 보지 않았던 무서운 영화를 ‘폴리(Foley)’ 를 시작하고 나서 왕창 보게 되었다. 그것이 타의든 자의로든 말이다.

보통 폴리 작업은 작품을 개인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 의뢰 오는 영상이 예산과 맞으면 진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작업이기에 ‘내가 하고 싶어도’ , ‘내가 하기 싫어도’ 같은 선택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든 연이 닿아 작업한다고 생각하면 내게 오는 작품 모두가 소중하다.


내게 다가온 작품 모두가 고맙지만, 그와 별개로 공포 영화 작업은 무섭다. 조금 많이.

폴리 작업하기 전, 효과음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 예시등을 찾기 위해 스스로 무서운 영화 여러 개를 감상했다.

‘공포’라는 장르는 소리의 집중도가 다른 작품보다 높고, 폴리(Foley)의 추상적인 표현도 다양하기에 두렵지만 소리가 만들어준 길을  하나, 둘 따라가 보았다.

그러다 마주하는 공포 분위기의 클라이맥스, 나를 놀라게 하는 영상과 소리 모두가 참 얄미웠다.




작업에 참고할 소리를 나름대로 두둑하게 채워놓았으니 본격적으로 폴리 작업의 시작이다.

다른 작품과 달리 자세히 보면 처음부터 마커가 촘촘히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 귀신’ ‘여기도 귀신’  ‘또 귀신’ 이 그 예시다.


이곳저곳 심어놓은 귀신 방지판

이것은 우리가 심어 놓은 일종의 ‘놀라기 금지 팻말’ 같은 것인데,

몇 번을 봐도 적응되지 않는 ‘귀신 출연’에 우리만의 마음 준비 카운트 다운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녹음이 시작되고  특정 장면이 다가올 때쯤 마이크를 통해 조용히 폴리아티스트에게 말한다.

“곧 귀신 나와요.” 

“또 나와요”

“으악!” 

봐도 봐도 적응되지 않은 귀신의 모습에 익숙해지기 위해 천천히 드래그를 시도한다.

이런. 더 무섭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싶지만, 그럼 작업을 못하잖아. 진퇴양난이다.

“저거 가짜야! ”라고 센척하며 등에 흐르는 식은땀은 숨긴다.

 다행히 어찌저찌 녹음을 끝냈다.


진이 빠져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는 나의 뒤로 폴리아티스트가 쭈뼛쭈뼛 걸어온다.

“진짜 미안한데, 무서워서 그래.  화장실 같이 가서 문 앞에서 기다려줄 수 있어?”

“뭐야, 아 초딩이냐.”라고 어이없는 척했지만 사실 나도 엄청 무서웠다는 걸 

이 글을 통해 이실직고한다.



공포장르에는 ‘이미지’적인 폴리 효과가 두드러져야 하기에 폴리아티스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는 어디 선가 목이 박혀 있는 큰 나무 박스를 구해오더니 깊이 박힌 못을 조금씩 빼냈다. 

그리고는 온몸을 다해 상자를 비틀기를 반복하더니, 낡은 목조 건물 속 바닥의 ‘삐그덕, 끼익’ 하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다 중간중간 “아야! 가시 박혔어.”라는 소리와 함께 녹음을 중단하지만, 빨리 다시 녹음을 재촉하는 나다.

이런 소리는 한번 흐름을 놓치면 비슷한 효과음이 만들어지지 않고, 감을 잃어버리면 알맞은 소리를 찾는 것이 오래 걸리기 때문인데 어쩌면 아파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냉철하게 녹음을 진행하는 나의 모습이 어떤 무서운 영화보다  더 공포일지도 모른다.





소리로 가득했던 작업실이 적막함으로 채워지고 어느덧 퇴근시간이다. 

퇴근길은 언제나 신나지만 공포영화 작업 후 집에 가는 길은 무서움반, 신남 반이다.


긴장하며 폴리 부스 전등을 끄러 가는 길, 평소에 아무렇지 않던 폴리 부스 앞에서 괜히 흠칫한다.

산처럼 쌓인 물건과 그들의 그림자, 또 소품으로 받은 무당 방울과 커다란 사람 얼굴 커버의 잡지등이 특히 놀라게 하는데 한몫하는 멤버들이다. 그중 가장 최고봉이 있었으니 그건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가발이다.  영상 속에서 티 나지 않게 은은하게 묻어 나오는 소리와 달리 어둠 속에서는 묵직한 존재감을 보이는데 심지어 공 위에 얹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날은 아마 작업실 불을 온통 켜놓고 퇴근하는 날이 될 수도 있겠다.




여름이 되면 티비 곳곳에서 '납량특집' 공포영화를 틀어준다.

작업 시 ‘마커’로 표시해 두었던 귀신은 영상효과와 강력한 효과음을 타고 한층 더 무서워지고 대담 해졌다.

그녀를 잘 포장해 준 거 같은 뿌듯함도 잠시,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에 또다시 화들짝 놀라는 나다.

작업하며 다 외웠다 생각했는데, 아직 무서운 영화는 조금의 내공이 더 필요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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