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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나 Sep 10. 2023

보내주는 일, 맞이하는 일

폴리부스를 청소하며

덥다 덥다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여름이 훌쩍 지나갔다.

가을이 조금씩 다가오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달라진 점을 하나, 둘 찾아본다.

살짝 높아진 파란 하늘과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

여름과 가을의 틈

이 속에서 또 다른 여름을 보낼 때가 되었다.


계절의 사이, 봄과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

얇은 옷을 꺼내 두꺼운 스웨터로 옷장을 채우는 일도

얇은 이불에 솜을 꽉 채워 넣는 일도

깨끗이 닦은 선풍기를 창고에 보관하는 일도

서로 다른 계절을 마주 하기 위한 준비들일테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 그리고 다가올 계절을 맞이하는 것처럼

폴리부스에도 다양한 형태의 작품(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ASMR 등) 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또 다른 작품들을 환영할 준비를 한다.


소품으로 받은 물건들을 정리해 제작부에 다시 반납하는 일,

영상 속 정들었던 인물들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따라 하는 일,

(작업상 수십 번 이상씩 영상을 보고 듣게 되니 자연스레 대사를 외우는 일이 흔하다.)

그리고 난장판이 된 폴리부스의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는 일이 그렇다.


지나가는 계절을 시원 섭섭하게 보내주는 것처럼 꼼꼼히 완성된 작품을 배웅하는 과정을 좋아한다.

마음속에 남겨진 여운을 흘려보낼 수 있어서, 또 '끝'이라는 단어와 ‘시작’이라는 언어가 맞닿아있는 느낌이 묘하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폴리부스 청소하기’다.




직업을 갓 마친 폴리부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원래도 깨끗한 적 없었던 폴리부스 이긴 하지만

그나마 당사자 만이 알아볼 수 있는 쾌적한 모습은 당연히 볼 수 없을뿐더러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짝이 없는 신발과 원래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를 물에 젖은 휴지 뭉텅이, 이리저리 튀어있는 진흙의 잔해등이

“자, 치워.”

“네?’

“치우라고.”

라고 말하고 있다.


� :키워 �:네? �:키우라고



청소를 위해 필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더러워도 괜찮아질 편한 옷

사실 옷은 입고 싶은 걸 입어도 상관은 없지만 먼지가 왕창 묻기 때문에

티가 안나는 검은색 옷이나 회색옷이 좋겠다.

두 번째는 두꺼운 목장갑

유리파편이 군데군데 숨어있는 것은 물론 언제 다칠지 모르는 손을 보호하기 위해 장갑은 무조건무조건이다.

세 번째는 마스크

청소 때 먼지를 들이켜 목이 칼칼 해지는 경우를 대비해서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몸을 회색 트레이닝복과 튼튼한 신발, 장갑으로 무장한다.

그리고 얼굴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숨을 후-욱 하고 들이키는데

먼지 먹는 일이 익숙한 폴리아티스트는 얇은 장갑 하나만 손에 감은체 무심하게 폴리 부스로 들어간다.


폴리부스 청소는 어렵다.

안 쓰는 물건과 쓰레기를 구분하는 일이 특히나 그렇다.

그날은 난생처음으로 폴리부스 청소하는 날이었다.

100리터 쓰레기봉투를 옆에 두고 무작정 쓰레기를 담으라는 폴리아티스트 말을 따라

내 나름대로 불필요해 보이는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지푸라기와 비어있는 담뱃갑, 병뚜껑, 엉켜있는 액세서리 같은 것들로 기억을 하는데

그걸 본 폴리아티스트는 이건 작업에 필요한 물건이라 버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쓰레기와 물건을 구분하는 일, 어렵다.


그 말에 전략을 바꿔 구겨진 종이와 비닐포대, 과자 봉지를 물건 보관하는 곳에 따로 빼두었는데

이번엔 이건 버리는 물건이니 쓰레기봉투에 넣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엇갈리는 상황에 눈치를 슬며시 보게 된 나는

쓰레기를 처리할 때마다

“선배 이거는요?”

“선배 저거는요?”

“선배 이거 버려요?”

“선배 이거 냅둬요?” 라고 수없이 질문을 던졌다.

아마 폴리부스에서 버린 쓰레기 보다 내가 던진 물음표가 훨씬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연차가 쌓인 지금은 그때보다 물건 파악에 대한 기준이 생겼지만

여전히 폴리부스만 들어가면 물음표가 쉬지 않고 튀어나온다.


얼음은 또 어떻게 치우냐고!!




먼지를 머금은 물건을 차곡차곡 쌓아 정리하다 보니

흩날리는 모래 먼지는 마스크를 끼고 있어도 코로 깊게 스며든다.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 때 바닥에 앉아 열심히 응원하며 모래 바람을 맞은 그때처럼

으쌰으쌰 청소에 힘을 실어본다.

너무 많이 들이켰는지 자꾸만 잔기침이 나온다.

매번 녹음을 할 때마다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먼지를 마시는 폴리아티스트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지러이 내팽개쳐진 물건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간다.

여기저기 엉켜있는 복잡한 곳에서 나름의 규칙에 따라 자리하는 그들은

새로운 영상을 작업할 때면 어느샌가 또 이리저리로 흩어질 테다.


얼추 폴리부스 청소가 끝났다.

남들이 보면 이제부터 시작이 아닐까 라는 물음을 가질 정도로 티가 안 난다.

처음엔 정말 달라진 게 없어서 왜 청소를 해야 할까,

어차피 내동댕이 쳐질 물건을 왜 올려놓을까,라는 무수한 의문과 허무함을 가진 적도 있지만

우리만이 알 수 있는 폴리부스의 깨끗함과 상쾌함을 이제는 안다.

더불어 이 쾌적함이 며칠 못 간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제일 깨끗한 부스상태 1
제일 깨끗한 부스상태 2


화장실에서 코를 ‘휭’ 하고 푼다.

평소와 다르게 검은 콧물이 계속 나온다. 먼지를 왕창왕창 들이켰기 때문일 거다. 먼지에는 삼겹살이 좋다고 하던데, 맛있는 삼겹살을 먹으며 남아있는 작업의 여운을 기분 좋게 보내주기로 했다.

내가 사랑한 지난여름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고

새로운 작품을 맞이할 거다. 다가올 어여쁜 가을을 기다리는 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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