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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나 Oct 05. 2023

선배의 발이 문어발이면 좋겠다.

제목 그대로다. 선배의 발이 문어발이었으면 좋겠다.

8개는 너무 많이 바라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3개에서 4개 정도는 어떨까.

그럼 발소리 녹음이 조금은 수월해질 텐데.

MBTI 가 지극히 S인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상상이다.


영상을 통틀어 제일 많이 등장하는 소리는 일반적으로 발소리다.

이야기하며 걷고,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뛰기도 하고,

단체로 우르르 나와 싸우거나 때로는 전쟁을 하기도 한다.


딱히 녹음된 발의 수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가까이 보이는 주인공들과 그의 친구들, 부모님, 뒤에 지나가는 행인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의 수와

녹음을 시도하는 횟수를 곱하면 족히 500개가 넘는다.



-2개(발의 개수) X 등장인물의 수 X N번째 녹음을 시도하는 횟수



만약 악어떼가 아닌 좀비 떼 그리고 456명의 게임 참가자가 출연하는 작품이라면

폴리아티스트의 발이 8개라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 되어버리는데

글 제목을 문어발 말고 오징어 발로 정해야 됐나 싶다.  




발소리는 인물의 감정과 특징 표현의 또 다른 장치다.

누군가에게 복수하러 성큼성큼 걷는 조폭의 묵직한 구두발소리,

고백에 성공한 자의 날아갈듯한 가벼운 발소리,

거하게 취해 휘청휘청 걷는 취객의 운동화소리가 모두 다 다른 것처럼

등장인물의 성격에 따라 걷는 방식도 사용하는 신발도 가지각색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소리들 사이에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폴리아티스트 혼자 오롯이 발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작품 속 인물이 몇 명이 등장하든 간에 그의 두 발이 모든 발소리의 근원지인 셈이다.





영상 속 456명이 모여 상금을 위해 1번째 게임을 시작한다.

폴리아티스트는 참가자와 비슷한 신발의 운동화를 신고 모래가 가득 담긴 발판 위에 섰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말의 시작과 함께 배우와 동기화된 그는

첫 번째로 출발한 324번의 발에 맞추어 우다다다 달리다 총에 맞은 듯 털썩하고 쓰러졌다.

두 다리에 힘을 온전히 실은 선배의 무릎이 걱정될 정도로 ‘쿵’ 하는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흐르며 본격적인 게임의 서막을 알렸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상황에 폴리아티스트의 발도, 녹음하는 나의 귀와 손도 정신없이 바빠지며

250번, 218번, 1번, 456번 등의 발소리를 하나씩 채워 넣었다.

아비규환의 상황이 한층 더 짙은 소리의 외투를 입은 듯 웅장해지고 두터워진다.


출처: 구글 이미지검색


열정적으로 녹음했다는 증표인지

날리는 모래먼지가 폴리부스도 모자라 스멀스멀 나의 녹음자리까지 흩어지기 시작했다.

먼지로 뿌예진 공간을 조금 빨리 잠재우는 폴리아티스트만의 비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분무기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먼지를 없애기 위해 허공에 분무기를 착착 뿌리는 그의 손이 어느 때보다 빠르고 다급했다.


끝없이 이어진 발의 움직임에 선명하던 발소리가 점차 흐릿해지며

‘고갈된 폴리아티스트의 체력을 잠시 보충할 시간’이라는 걸 알린다.

추운 겨울이지만 땀에 흠뻑 젖은 선배를 위해 재빨리 에어컨을 튼다.  

발소리를 녹음하는 일 앞에서 계절은 잠시 깍두기 신세다.

겨울도 덥고 여름은 무척이나 덥다.


네모난 강화유리를 커다란 담요 위에 올려 발판을 만들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맨발로 녹음이 진행된다.

얼마 남지 않은 참여자들의 유리다리 건너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텅텅거리는 울림을 자연스럽게 살리기 위해 몸의 무게를 싣을 듯 말 듯 강약을 조절하는 폴리아티스트의 덕분에 영상에 한층 긴장감이 묻어 나온다.


그렇게나 많던 사람들이 회 차가 갈수록 탈락을 거듭하다 보니 처음에 시작했던 인물들의 수가 보다 확연히 적어진다.

덕분에 자연스레 폴리아티스트가 발을 연기하는 부담도 당연히 줄어들게 되는데,

여기서 잠깐 비밀 하나 말하자면 선배와 난 등장인물이 죽으면 조금 좋아한다.

이렇게 적으니 무자비한 사람들처럼 보여 당황스럽긴 한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심적으로 신이나하는 것이 아닌 녹음 횟수가 줄어들어 편해지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부디 오해 없길 바란다.)


최종적으로 두 인물이 남았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흐린 하늘 밑 운동장에서 마지막으로 오징어 게임을 하는 그들이다.

거칠었던 모래 바닥이 수없이 내린 비로 질퍽 해졌다. 이에 맞춰 바가지에 물을 가득 받아온 폴리아티스트는 녹음부스 모래바닥에 물을 가득 뿌리고는 비에 젖은 작은 운동장을 만들었다.

검은 굽 있는 구두가 진흙 색으로 점차 변해가고 그것도 모자라 선배 다리와 바지, 부스의 벽과 물건에도 여기저기 튀었다.

물에 관련된 발 녹음은 순서를 맨 끝으로 몰아두는데 이것이 그 이유다.





456명을 잘 보내주었더니 이제는 좀비가 찾아왔다. 많은 무리, 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다.

좀비는 단체로 뛰어다닌다는 것과

몸을 꺾으며 각각의 다리 한쪽에 무게를 실어 걷는다는 특징이 있는데

다행히 이번에 나온 좀비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기에 조금은 수월 할 수 있겠다.


사극이 현대극보다 발 녹음에서 편한 점이 있다면 신발을 자주 갈아 신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이힐, 워커, 운동화처럼 옷차림에 맞게 입는 것과 달리 사극은 하나에서 두 개의 신발 이면 충분하다.

또 흙과 돌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을 사용하기에

마이크를 들고 발판을 이곳저곳 이동하는 동선도 줄어든다는 장점이 있다.


좀 걸어 다녔으면 좋겠는데 조선 좀비들은 참 빠르게 그리고 무지 오래 달린다.

그 덕에 일과 운동이라는 1석2조의 효과가 있지만, 끊임없이 달리는 폴리아티스트가 조금은 안쓰럽다.


마이크의 수음능력이 워낙 좋아서 자칫하면 미세한 소리가 같이 녹음되곤 하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특히 달릴 때는 숨을 참고 달려야 한다.

막판에 몰아쉬는 숨과 함께

“어땠어?”라고 물어보는 선배의 물음에

“이거 별로였어.”라고 답하는 난

평소 녹음 때보다 눈치를 보는데 괜히 혼자 앉아있는 것도 미안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다시”

“다시”

“다시”가 이어진다.

속도가 안 맞거나

숨소리가 들어가거나

발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물 마신 배에서 소리가 나서 등등의 여러 이유로

폴리아티스트는 이후로도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녹음이 수월할 수 있겠다는 초반의 말은 없었던 일로 해야 될 듯 보인다.



가제트형사의 팔/ 출처:구글이미지검색


좀비는 죽어도 또 죽어도 왜 이렇게 많은지 두 개만 있는 선배의 발이 무척이나 아쉽다.

‘가제트 형사’의 만능 팔처럼  폴리아티스트의 발도 필요할 때 ‘위-잉’ 하고 나와주면 어떨까,

아무리 많은 좀비 무리가 나와도 끄떡없는 폴리팀이 될 자신 있는데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할 시간에 녹음이라도 하나 더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갈길이 아주 머니까.

채워진 발소리 보다 채워 넣어야 할 발소리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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