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마트 속 과일 코너를 서성인다.
알맞게 익은 바나나와 빨간 토마토, 이젠 겨울이 아니어도 보이는 감귤과 얼룩무늬를 예쁘게 입은 수박까지.
과일 청과는 자주 가는 고물상이나 철물점과는 또 다르게 폴리 재료들이 가득한 곳이다.
필요한 과일을 하나 둘 모아놓으니 녹음실 로비는 어느새 싱그러운 향기로 채워진다.
가득 쌓인 과일 더미를 보며 시원한 과일주스 레시피를 떠올렸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작업실에서 만큼은 녹음에 양보하는 것이 맞다.
과일은 색깔과 모양, 맛과 향까지 흠잡을 때 없는 매력적인 친구들이지만 (두리안은 아직 쉽지 않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물론 폴리부스 한정이란 전제가 있긴 하지만,
이제부터 과일의 또 다른 모습을 낱낱이 공개하려고 한다.
거꾸로 해도 토마토, 귀여운 이름을 가진 토마토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나는야 주스 될 거야.
나는야 케첩 될 거야.”
라고 말하는 토마토가 폴리 부스에서는 ‘칼 찌르는 소리’가 된다.
이때 폴리아티스트는 차가운 모습을 한 덜 익은 초록 토마토보다는 적당히 잘 익은 빨간 토마토를 선호하는데, 물컹한 토마토를 온 힘을 다해 으깨기 시작하면 주르륵 흘러내리는 토마토 즙이 마치 칼에 찔려 ‘피 흐르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작정 짜내기 보단, 십몇 년간 다져진 폴리아티스트의 노하우인 손의 강약 조절이 포인트인데 미세하게 만들어내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귀 근처에 서성 될 때면 영상에 어울리는 ‘좋은 소리’ 임이 분명하지만 기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5월의 초입, 아직 여름이 오지 않았는데도 날씨가 더워진 탓인지 수박 구매가 수월했다.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낑낑거리며 커다란 수박을 폴리부스에 바로 내려놓고는 동그란 수박을 자르지 않은 채로
조심스레 껍질을 쑤신다.
뇌 속에 장비를 설치하는 소리를 표현한 것으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수박 껍질을 깊숙이 통과하며
‘우지끈’ 하는 소리를 낸다. 뒤따라 흘러내리는 수박 액체의 촉촉한 느낌까지 살려 녹음하면 다소 잔인한(?) 효과음이 영상 속 실험 장면을 한층 더 짙게 만든다.
과일 중 한 덩치 하는 수박은 크기만큼이나 주로 묵직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가끔은 수박을 통째 세워두고 도끼로 찍어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둔기로 내려치는 효과음으로 사용한 적도 있다.
여러 개가 한 곳에 담긴 다른 과일과 달리 수박은 음식물 쓰레기 처리도 쉽지 않고 비싸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 멜론과 호박등으로도 대체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수박이 단연 일등이다.
바나나는 폴리녹음의 '인싸'라고 불린다.
사계절 내내 구하기도 쉽고 합리적인 가격과 적당한 개수 구성으로 인기가 높다.
바나나의 활용도는 꽤나 다양한데, 피의 꾸덕한 표현과 구토시 변기에 떨어지는 토사물 그리고 가끔은 대변 묘사에도 최적화다. 생각보다 강한 바나나의 반전 매력은 폴리부스 한정으로 접할 수 있기에 이는 나름 ‘리미티드 에디션’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작업이 끝난 뒤 부스 문을 열면 모여있던 과일냄새가 폴리부스 이곳저곳을 휘집는다.
녹음의 여파는 짙게 베인 농축된 디퓨저의 향기처럼 깊다.
여기저기에 빨갛게 튀어있는 토마토의 붉은 흔적도 닦아내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얼룩옷을 입은 수박도 봉투에 넣기 쉽게 잘게 자른다.
으깨진 모습의 바나나는 냄새가 아니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어있다.
다양한 모습을 한 과일들을 노란 음식물 봉투에 차곡차곡 담아 정리하고는 남은 과일을 주섬주섬 챙긴다.
과일 녹음을 진행할 때 좋은 점은 며칠 먹을 든든한 과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집에 가져온 과일들을 보며 다른 과일들이 폴리부스에서 보여줄 모습은 어떤 것 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그때도 내가 모르는 새로운 모습이 나온다면 글로 또 적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