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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나 May 31. 2023

폴리아티스트로 데뷔하자.

20살, 풋풋한 대학생이었던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높은 뾰족 구두를 신고 등교하고 싶었다.

자그마치 굽이 7센티나 되는 높은 구두였는데, 1교시 수업이 있던 날이라 새벽부터 구두를 신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운동화를 신으면 성큼성큼 내딛는 보폭이 구두를 신어서 인지 종종걸음으로 변했고, 신발에 적응하지 못한 발은 조금씩 아파왔다.


하필 그날은 오후까지 수업이 있는 날이라 일찍 집에 오지도 못하고 퇴근시간과 맞물린 하교 시간으로 인해 한 번도 앉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은 참 길었다. 발이 너무 아파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집에 뛰어오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 번 하다 보니 겨우 집에 도착했다.  꽤나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는지 구두를 멀리하게 된 계기도 이 언저리인 듯하다.




그렇게 구두와 멀어지다가 다시 접점이 생기게 된 건 ‘폴리’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폴리부스에 있는 여자 구두 소리가 영상과 전부 어울리지 않아, 급하게 집에 있는 엄마, 언니 구두를 직접 집에서 챙겨 와야 했다.


폴리아티스트의 발은 280mm , 내가 가져온 구두는 전부 240mm였기에

“한국 영화에 너의 발소리가 들어갈 영광을 주겠다!”

라고 말하며 폴리아티스트는 이번만큼은 내게 직접 소리를 내보라고 권했다.


‘이렇게 또 폴리아티스트가 되어보는 건가!’라는 벅찬 마음으로 대답은

“제가 어떻게 해요”라고 했지만, 속으론 무척이나 신났다.


추운 겨울밤, 녹음이 로케이션(야외나 실제촬영장소에서 녹음하는 일)으로 진행되었기에 싣고 온 구두는 평소보다 차갑고 딱딱했다.



구두를 신고 걷는 폴리아티스트 사진출처 :Inner space 기사사진



마치 폴리 아티스트가 된 듯 진지하게 영상을 쭉 시청했다.

사실 어떻게 봐도 그냥 걷는 방법 밖에 없는 거 같아 일단 한번 해보기로 했다.


높은 구두를 신었다.  몇 년 만에 신은 하이힐은 영 어색했다.

늘어나 있는 신발은 헐렁 거리고, 굽을 밟고 높이 떠 있는 발은 폴리아티스트 데뷔가 설레어서 떨리는 건지, 추워서 떨리는 건지, 굽이 불편해 떨리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폴리아티스트는 내 발 근처에 마이크를 가져다 대며 하나씩 지시하기 시작했다.


“발에 리듬감을 봐.”

“박자를 세!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론 영화 속 주인공인데 몸은 따로 논다.

엉거주춤한 나의 자세를 보며


“너 몸치야?” 라며 껄껄 웃더니

“이렇게 아니 이렇게 아니! 아니! 아니! “


라고 말하며 이내 웃음기를 잃어버린다.


“그럼 일단 춤추지 말고 걸어 그냥 걸어봐. 녹음해서 에디팅으로 만들어 볼게.”


폴리아티스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본 나는 조심스레 몇 발을 내디뎌 보았다.

또각또각 대신 찌그덕 거리는 불편한 소리만 공터에 울려 퍼졌다.

그는 답답한지

“아니 그냥 걷는 것도 못해?” 라며 답답해했다.




보기와 다르게 난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걷고 있었다.

발 시린 거도 참고, 헐떡이는 구두를 발가락으로 오므려서 필사적으로.

심지어 추워서 콧물이 줄줄 흐르지만 훌쩍임도 참고 있는데 서러웠다.

(훌쩍이며 걸으면 녹음기에 전부 녹음되어 쓸 수 없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3분 남짓한 장면의 발소리를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다.

'몸치인 내가 문제일까, 몇 년 만에 신은 하이힐이 문제일까, 아니면 둘 다?'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채울 무렵,

참다못한 폴리아티스트는 자기가 그냥 하겠다고 말하고는, 작은 구두에 발을 집어넣으며 망가지지 않게 조심히 한걸음, 두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높은 구두에 큰 발이 구겨진 불편한 모양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새벽에 울리는 여자 구두 소리는 영상 속 주인공을 품고 어느새 외로운 감정을 담아냈다.

내가 몇 시간 발을 굴러도 나오지 않았던 소리가 불과 몇 분 안에 그를 통해 완성된 것이다.



아쉽게도 이렇게 폴리아티스트 데뷔(?)는 무산되었다.

녹음된 나의 발소리를 들어보았다. 소음이 따로 없었다. 이대로 썼다간(물론 절대 사용될 일 없지만) 영화의 감정 신을 방해만 할 뿐이라는 생각에 조용히 녹음된 오디오 클립을 삭제했다. 그리곤 다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녹음과 편집에 집중해야겠다’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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