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켠다.
하얀 메모장 속 ‘커서’는 깜빡깜빡 무언가가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분명 내가 하고 싶어 시작한 글쓰기인데, 막상 쓰려고 하니 글 쓰는 것 외의 모든 것들이 흥미롭다.
평소에 관심 없던 폴더를 열어 파일을 정리하고, 묵혀두었던 사진들도 클릭하며 추억에 잠겼다가, Dock 밑에 아이콘도 요리조리 살펴본다.
볼빨간사춘기의 ‘빈칸을 채워주시오’를 들으면 텅 빈 메모장을 채울 수 있을 거 같아 그녀의 음악도 재생해 보았지만, ‘한 곡만 더, 한 곡만 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디스코 그래피를 통째로 감상해 버렸다.
아 이제 진짜 써야 한다. (압박하는 이가 아무도 없지만 그냥 나 스스로의 약속이다.)
생각해 보니 나의 이런 행동은 ‘에디팅’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좋다! 오늘은 녹음 말고 에디팅에 대한 글을 한번 써봐야겠다.
에디팅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문득 윈도우에 있는 디스크 조각모음을 떠올렸다.
디스크 조각모음. 요즘도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윈도우를 쓸 때 (지금은 작업상 맥을 주로 쓴다.)
컴퓨터가 느려지면 언니와 아빠가 한 번씩 하라고 시켰던 기억이 있다.
디스크 조각모음을 실행하면, 아이콘 그림에서 전체의 네모난 모양이 잘게 잘게 쪼개지며 조각조각 난 파일들이 흩어졌다, 붙었다 를 반복한다.
이 작업은 꽤나 오래 걸려, 생각해 보면 밤새 컴퓨터를 켜놓았던 것 같은데, 빨리 컴퓨터를 하고 싶은 나의 급한 마음과 달리 컴퓨터는 꽤나 느긋했다.
여러 파편이 모여 하나의 큰 모습이 된다는 것, (디스크 조각모음 아이콘 겉모습 기준)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 이렇게 에디팅과 디스크 조각모음은 비슷한 점을 서로 나눠가졌다.
누구보다 순발력이 빠른 폴리아티스트는 영상 속 어떤 장면이 나오더라도 그럴듯하게 ‘싱크’를 맞춘다.
쉼 없이 동동 구르는 여러 개의 발은 물론이고, 실사가 아닌 캐릭터의 조금은 어색한 모양새도 끄떡없다.
이렇게 완성된 녹음 트랙이 그대로 작품에 쓰이면 좋겠지만, ‘에디팅’이라는 또 다른 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현장에서 녹음되어 묻어 나온 소리에 정확히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대사 위주로 녹음되는 현장이지만, 종종 발소리나 물건 내려놓는 소리들이 크게 녹음될 때가 있다. 이때 동시소스에 잘 맞춰주지 않으면 ‘뚜벅뚜벅’ 이 아니라 뚜버버벅, 뚜버벅, 처럼 자칫 말발굽 소리처럼 들린다.
또 다른 이유는 최종적으로 좋은 소리를 완성하기 위함이다.
어울리는 소리를 찾기 위해 여러 번의 녹음을 거쳐 마음에 드는 소리를 여러 개 저장해 두고는, 에디팅 때 최종적으로 제일 마음에 드는 소리를 사용하여, 파형을 알맞게 자르고 붙이며
미처 폴리아티스트가 맞추지 못한 부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여 영상에 어울리는 소리를 만드는 것이다.
평균 영화 러닝 타임은 120분, 2시간짜리 영상을 통째로 프로그램에 불러와 작업하게 되면
용량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책의 1권, 2권처럼 ‘권’이라는 단위로 편집본 영상이 오는데, 평균 1권에 영상 20분 정도의 분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권에 들어있는 오디오 파형은 단순히 폴리소스만 따져봤을 때 대략 300개에서 500개 정도 되는데
이 많고 많은 파형을 오려내어 언제 알맞은 자리에 붙일지, 눈앞이 깜깜해지는 건 사실이다.
에디팅은 외로운 작업이다.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을 보며 알맞은 자리에 소리를 넣고 듣고, 다시 지웠다가, 붙이고 의 반복이 수백 번 했다는 생각이 들어 ‘별로 안 남았나?’ 하고 R버튼 (화면이 작아져 한눈에 작업 시트를 볼 수 있다.)을 누르면 택도 없이 뒤에 많이 남은 오디오파일들이 날 반기며 손을 흔들고
영상시간(타임코드 라고 한다.) 기준 10분 정도 작업한 거 같아 올려다보면 타임코드가 고작 3분을 가리킨다. 프로그램 ‘렉’ 아닐까 생각하며 껐다 켜보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해를 보고 시작했던 작업이 어느덧 달을 본다. 현장 녹음 소리를 자주 듣다 보니 어느새 대사도 외웠다. 고요한 새벽 혼자 대사 놀이를 하며 딸깍 하는 마우스 소리와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만이 작업실에 맴돈다.
영상 속 인물들과 정이 들 무렵, 소리 조각 모음이 끝났다.
어찌 보면 지루하고, 고요한 작업이지만 ‘완성’이라는 단어 앞에서 어떠한 일이든 인고의 시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폴리(Foley)는 대사와 음악과 달리 크게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편은 아니다.
“그 대사 진짜 좋았어.” “ost 진짜 좋더라.”라는 말은 자주 듣지만
“그 발소리 되게 좋더라” “물 따르는 소리가 기억에 남았어.”등의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에디팅 때 크게 들리던 소리들이 영상의 본편 속에서 들릴 듯 말 듯 할 때면, 종종 허탈함이 밀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폴리(Foley) 소리가 전부 크게 ‘우당탕탕’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잘 들리지 않는 소리는 녹음하지 않고 넘어가고 싶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촘촘히 짜인 ‘폴리’라는 조각들이 있기에 다른 부분들이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 본다.
사운드는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좋은 소리가 되니까 말이다.
반복되는 에디팅에 어깨와 손목이 아파온다.
초짜 시절 보단 속도가 빨라졌지만, 지금도 에디팅은 꽤나 적적하다.
소리의 파편들을 오려 붙여 만드는 오늘의 소리 조각모음은 '언제쯤 끝을 보일까' 생각하며 R을 눌러본다.
오 노우, 꽤나 남았다. 오늘도 꽤나 늦게 잠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