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퍼링 갤러리(Whispering Gallery)

30m 밖에서도 들리는 비밀 대화

by JUNSE

Sound Essay No.92

위스퍼링 갤러리(Whispering Gallery) : 벽을 타고 흐르는 속삭임

30m 밖에서도 들리는 비밀 대화 : 돔(Dome) 건축이 만든 '소리의 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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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벽에 대고 말하면 반대편에서 들린다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 거대한 돔 천장 아래에 있는 원형 회랑(Gallery)은 관광객들에게 아주 특별한 장난감입니다.


돔의 한쪽 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친구에게 귓속말하듯 "안녕?" 하고 속삭여 보세요. 그러면 지름이 32미터나 되는 거대한 돔의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친구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봅니다. 바로 귀 옆에서 말한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더 신기한 것은, 돔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은 이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오직 벽에 붙어 있는 두 사람만이 비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 현상. 그래서 이곳을 '속삭이는 회랑(Whispering Gallery)'이라고 부릅니다.



2. 소리는 벽을 좋아해: '레이리 파(Rayleigh Waves)'

image.png 출처 : www.guidelondon.org.uk

소리는 보통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에너지를 잃습니다(거리 감쇠). 30미터 거리라면 속삭임 소리는 공중에서 흩어져 사라져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둥근 돔이나 타원형 천장에서는 소리가 독특하게 움직입니다.


당구공 원리: 소리가 곡면 벽에 부딪히면 밖으로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벽을 타고 둥글게 미끄러지듯 이동합니다.


연속 반사: 소리 파동이 오목한 벽면을 따라 연속적으로 반사(Total internal reflection과 유사)되며 전진합니다. 마치 그릇의 가장자리를 따라 구슬을 굴리면, 구슬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뱅글뱅글 도는 것과 같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로드 레이리(Lord Rayleigh)는 이 현상을 처음으로 규명했습니다. 이렇게 벽을 껴안고 이동하는 소리 파동을 *위스퍼링 갤러리 모드(Whispering Gallery Mode)'라고 합니다. 이 모드로 이동하면 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않고 에너지가 보존되기 때문에, 아주 먼 거리까지 또렷하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3. 스파이들의 도청 장소?


이 현상은 역사 속에서 의도치 않은 '정보 유출'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미국 국회의사당(Capitol)의 내셔널 Statuary Hall 역시 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초,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의원은 자신의 책상 위치가 우연히 '소리의 초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저 멀리 반대편에 있는 야당 의원들이 나누는 은밀한 작전 회의 내용을 엿들었다고 전해집니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말이 정치판에서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4. 베이징 천단공원의 회음벽

image.png 출처 : 스포츠 동아

동양에도 같은 원리의 건축물이 있습니다. 중국 베이징 천단공원(Temple of Heaven)에 있는 '회음벽(回音壁)'입니다.


이곳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인데, 둥근 담벼락을 따라 소리가 전달됩니다. 동쪽 끝에서 속삭이면 서쪽 끝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죠.


고대인들은 이것을 신의 조화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벽돌과 완벽한 원형 구조가 만들어낸 '음향학적 우연' 혹은 '장인의 직관'이었습니다. 벽면이 거칠었다면 소리는 난반사되어 사라졌을 테니까요.



5. 현대 기술로의 진화


이 '위스퍼링 갤러리' 원리는 현대 최첨단 기술에도 응용되고 있습니다.


빛을 가두는 '광학 공진기(Optical Resonator)'나 초소형 '레이저'를 만들 때, 빛이 원형 구조 안에서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회전하며 증폭되도록 만드는 기술이 바로 이 원리에서 왔습니다. 대성당의 돔에서 발견된 소리의 비밀이, 이제는 인터넷 광통신과 양자 컴퓨터를 만드는 핵심 기술이 된 것입니다.



6. 비밀은 곡선을 타고 흐른다


직선의 공간에서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지만, 곡선의 공간에서는 소리가 벽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갑니다.


혹시 돔으로 된 건물이나 원형 극장에 가게 된다면, 벽에 귀를 대고 가만히 들어보세요. 저 멀리 있는 낯선 사람의 비밀스러운 고백이, 벽을 타고 미끄러져 당신의 귀로 배달될지도 모르니까요. 건축물은 때로는 훌륭한 '소리의 배달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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