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자는 '방언의 소리'를 아카이빙한다

사라져가는 언어의 소리 풍경 보존

by JUNSE

Sound Essay No.118

언어학자는 '방언의 소리'를 아카이빙한다

사라져가는 언어의 소리 풍경 보존

64543_54201_2758.jpg 출처 : 제주도민일보 jejudomin.co.kr 제주 할머니댁서 보내는 하룻밤…'올레길 할망숙소’

할머니의 목소리를 저장하는 사람들


제주도의 한 연구소. 90대 할머니가 마이크 앞에 앉아 있습니다. 연구자가 묻습니다. "예전에 밭일 하실 때 어떤 노래 부르셨어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60년 전 감귤밭에서 부르던 노동요를 천천히 읊기 시작합니다.


연구자는 단순히 가사만 기록하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억양, 숨 쉬는 패턴, 특정 모음을 발음할 때의 미묘한 떨림까지 고해상도 녹음 장비로 담아냅니다. 이것은 소멸 직전의 언어를 '소리'로 보존하는 작업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2주마다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UNESCO 조사).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주어는 UNESCO에 의해 '소멸위기언어'로 분류되었고, 육진 방언(함경북도 북부 지역 방언)은 이미 모어 화자를 찾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이 글은 사라져가는 방언과 언어의 '소리'를 기록하는 언어학자들의 작업을 들여다보고, 왜 우리가 이 소리들을 보존해야 하는지 탐구합니다.



언어는 '소리의 지문'을 가진다


같은 한국어를 쓰는데도, 서울 사람과 부산 사람의 말은 왜 이렇게 다르게 들릴까요? 이는 단순히 억양의 차이가 아닙니다. 음운 체계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음성학 연구실에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경상도 방언은 성조(聲調) 언어적 특성을 보입니다. 같은 '눈'이라는 단어도 높은 음으로 발음하면 '雪(눈)'이, 낮은 음으로 발음하면 '目(눈)'이 되는 것이죠. 이는 중국어나 태국어처럼 음의 높낮이가 의미를 구별하는 언어적 특징입니다.


반대로 전라도 방언은 음절의 길이로 의미를 구분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밤'을 짧게 발음하면 '栗(밤)'이, 길게 발음하면 '夜(밤)'이 됩니다. 이는 일본어와 유사한 특징입니다.


이런 차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언어학자들은 한반도의 역사적 인구 이동, 지리적 고립, 인접 문화와의 교류가 각 지역 방언의 독특한 음운적 정체성을 만들었다고 분석합니다.



제주어 : 살아있는 고대 한국어의 소리


제주어는 단순한 '방언'이 아니라 독립적인 언어로 분류되기도 합니다(UNESCO). 제주어에는 표준어에 없는 독특한 음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뜻하는 제주어 '아이'는 표준어와 철자는 같지만, 발음은 완전히 다릅니다. 제주어의 '아'는 중설 모음으로, 표준어의 '아'보다 혀의 위치가 뒤쪽에 있습니다. 이는 중세 한국어의 음운 체계를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됩니다(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연구).


국립국어원은 2010년부터 '제주어 구술 자료 수집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70대 이상 제주 토박이 화자들의 일상 대화, 민요, 설화를 녹음하여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제주어를 모어처럼 구사하는 세대는 대부분 70대 이상이며, 50대 이하에서는 유창한 화자를 찾기 어렵습니다. 연구자들은 "10년 내로 제주어 모어 화자가 거의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육진 방언 : 실향민의 기억 속에만 남은 소리

image.png 출처 : 나무위키 '육진방언

함경북도 최북단 육진 지역(경흥, 경원, 온성, 회령, 종성, 부령)의 방언은 한국어 중 가장 독특한 음운 체계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육진 방언의 가장 큰 특징은 자음 체계의 차이입니다. 표준어에 없는 'ㅿ' 발음이 여전히 남아있고, 'ㄹ'과 'ㄴ'의 구분이 표준어와 다릅니다(정승철 서울대 명예교수의 연구).


문제는 이 방언을 구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6.25 전쟁 당시 월남한 실향민과 그 후손이라는 점입니다. 현재 남한에 거주하는 육진 방언 화자는 대부분 80대 이상이며, 그나마도 60년 이상 표준어 환경에서 살면서 원래 발음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와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는 공동으로 '육진 방언 긴급 구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전국의 실향민 1세대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언어를 최대한 복원하여 녹음한 것입니다.

한 연구 참여자는 회고합니다. "고향 말로 이야기하려니 처음엔 단어가 잘 안 떠올랐어요. 그런데 몇 시간 이야기하다 보니 60년 전 기억이 되살아나더군요. 어머니 목소리, 동네 사람들 말투가..."



사투리의 음악성 : 소리로 듣는 감정의 결


방언은 단순히 '표준어와 다른 말'이 아닙니다. 각 방언은 고유한 음악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라도 방언은 흔히 '리듬감 있다', '노래하는 것 같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음성학적으로 분석하면, 전라도 방언은 음절 사이의 피치 변화(pitch variation)가 크고, 문장 끝 억양이 상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연구). 이는 마치 음악의 멜로디처럼 들리는 효과를 만듭니다.


반대로 경상도 방언은 스타카토(staccato) 같은 특성이 있습니다. 음절이 짧고 명확하게 끊어지며, 강세가 뚜렷합니다. 이는 단호하고 직선적인 인상을 줍니다.


서울 방언(표준어의 기반)은 비교적 평탄한 피치 곡선을 보입니다. 극단적인 고음이나 저음 없이 중간 음역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경향이 있죠.


이런 음악적 차이는 각 지역의 전통 음악에도 반영됩니다. 판소리가 전라도에서, 경상도 아리랑이 경상도에서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언어의 리듬이 음악의 리듬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AI로 복원하는 '할머니의 목소리'


최근 AI 기술은 소멸 방언 보존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와 KAIST의 공동 연구팀은 '방언 음성 합성 AI'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제주어 화자의 음성 데이터를 학습시켜, 입력된 텍스트를 제주어 억양과 발음으로 읽어주는 시스템을 개발한 것입니다.


이 기술의 의미는 단순한 'TTS(Text-to-Speech)'를 넘어섭니다. 가령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를 몇 시간분 녹음해두었다면, AI가 그 음성 특징을 학습하여 할머니가 읽지 않은 텍스트도 할머니의 목소리로 재현할 수 있습니다.


한 연구 참여자는 AI가 합성한 돌아가신 어머니의 제주어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녹음해둔 민요 몇 곡이 전부였는데, 이제 어머니 목소리로 제가 쓴 편지를 들을 수 있게 됐어요."



100년 후, 우리는 어떤 '한국어 소리'를 기억할까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2024년 서울의 20대가 쓰는 한국어는 1924년 서울의 20대가 쓴 한국어와 완전히 다릅니다. 10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문제는 변화의 속도와 방향입니다. 과거에는 지리적 거리가 언어의 다양성을 만들었습니다. 산으로 막힌 마을과 바다 건너 섬은 각자의 언어를 발전시켰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전국이 하나의 미디어 환경에 연결되어 있고, 서울 방송의 표준어가 24시간 모든 가정에 흘러들어갑니다. 언어의 다양성은 급속히 줄어들고, 획일화가 진행됩니다.


국립국어원의 '방언 소멸 속도' 연구에 따르면, 현재 추세대로라면 2050년경 제주어를 제외한 대부분의 방언이 '노년층만 사용하는 언어'로 전락할 것이라고 합니다. 2100년에는 한반도 전체가 거의 동일한 한국어를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의사소통의 효율성은 높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잃게 됩니다. 언어의 다양성이 담고 있던 사고방식의 다양성,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잃는 것입니다.



소리는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언어학자들이 방언의 소리를 아카이빙하는 이유는 단순히 학술적 관심 때문이 아닙니다. 소리는 한 문화의 가장 원초적인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100년 후, 누군가 2024년 제주도 할머니의 목소리 녹음을 듣는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들은 단순히 '옛날 말'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할머니가 살았던 시대,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 바다와 바람과 감귤밭이 만들어낸 삶의 리듬을 소리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할머니의 목소리를 녹음하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시간 여행의 문을 열어주는 일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녹음을 통해 21세기 초 한반도의 소리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다음번 고향에 가거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의 목소리를 녹음해두세요. 그들이 평소 쓰는 사투리로,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해보세요. 그 녹음 파일은 언젠가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후손에게,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장소로의 소리 지도가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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