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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귀로 세상을 만지는가 Part.1

소리가 물질의 정체를 드러내는 비밀에 대하여

by JUNSE


Sound Essay No.26

소리의 촉감 1부 - 우리는 어떻게 귀로 세상을 만지는가

: 소리가 물질의 정체를 드러내는 비밀에 대하여

사진: Unsplash의Paulina Milde-Jachowska


눈을 감고 들어보세요


잠시 눈을 감고 두 가지 소리를 상상해보세요. 첫 번째는, 오래된 도서관의 육중한 참나무 문이 '쿵'하고 육중하게 닫히는 소리입니다. 두 번째는, 얇은 양철판을 잡고 '촤르르' 흔드는 소리입니다.


어떤가요? 우리는 단순히 '문 닫히는 소리'와 '철판 흔들리는 소리'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리만으로 참나무 문의 단단함과 무게감, 그리고 양철판의 차갑고 날카로운 질감을 거의 '만진' 것처럼 느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소리는 그저 공기의 진동일 뿐인데, 어떻게 우리는 귀를 통해 사물의 무게와 온도, 재질까지 느낄 수 있는 걸까요?


이것이 바로 '소리의 물성(Sonic Materiality)'이라는 신비로운 감각의 세계입니다. 이번 글은 이 놀라운 감각의 비밀을 파헤쳐보는 첫 번째 여정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귀를 통해 세상을 만지고 이해하는지, 소리라는 파동 속에 어떤 물리적 정보와 기억의 지도가 숨어있는지를 함께 탐험해보려 합니다. 우리의 귀가 얼마나 위대한 탐정인지 알게 되면, 세상을 듣는 방식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모든 소리는 자신의 출생 증명서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그것을 만들어낸 사물의 '출생 증명서'와도 같습니다. 그 증명서에는 그 사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심지어 속이 비었는지 꽉 찼는지까지 아주 상세한 정보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이 정보를 읽어내는 법을 평생에 걸쳐 자연스럽게 배워왔습니다.




단단함과 밀도의 서명: 딱딱하고 밀도 높은 물체, 예를 들어 돌멩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떠올려보세요. '딱!' 하는 소리는 아주 짧고 날카롭습니다. 소리의 에너지가 순식간에 폭발했다가 사라지죠. 반면, 조금 더 무른 재질인 나무토막이 떨어지는 소리는 '쿵' 혹은 '퍽' 하는 소리로, 돌멩이보다는 조금 더 길고 부드러운 울림을 가집니다. 나무가 충격의 일부를 흡수하며 자신만의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리가 얼마나 날카롭고 짧게 끊어지는지, 혹은 얼마나 부드럽고 길게 이어지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물의 단단함과 밀도를 짐작합니다.


사진: Unsplash의Patrick Robert Doyle


크기와 무게의 목소리: 길가에 굴러다니는 작은 조약돌과 거대한 바위는 생긴 것만 다른 게 아니라, 내는 목소리부터 다릅니다. 크고 무거운 물체는 진동하는 속도가 느려서, 낮고 묵직한 '저음'의 소리를 냅니다. 반면, 작고 가벼운 물체는 빠르게 진동하며 높고 가벼운 '고음'의 소리를 내죠. 우리가 무거운 물건을 들 때 '끙'하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무거운 것들은 낮은 목소리를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리의 높낮이만으로도 그 사물의 거대함과 무게감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사진: Unsplash의Zoltan Tasi


속사정을 들려주는 울림: 잘 익은 수박을 살 때, 우리는 손으로 '통통' 두드려봅니다. 왜일까요? 수박의 울림소리(공명)를 통해 그 속이 얼마나 맛있게 꽉 차 있는지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속이 꽉 찬 수박은 맑고 경쾌한 소리를, 속이 비거나 너무 익어버린 수박은 둔탁하고 답답한 소리를 냅니다. 이처럼 사물이 내는 울림의 길이와 형태는 우리에게 그 내부 구조와 형태에 대한 비밀 정보를 들려줍니다.





뇌는 기꺼이 속아 넘어간다 - 소리의 착각과 진실


사진: Unsplash의Shawn Day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소리는 분명 사물의 물리적 정보를 충실하게 전달합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의 뇌가 때로는 이 정보를 '오해'하고, 기꺼이 그 '착각'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뼈가 부러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떠올려보세요. 우리는 화면을 보며 얼굴을 찡그리지만, 사실 우리를 소름 돋게 한 그 소리의 정체는 스튜디오에서 싱싱한 샐러리 줄기를 부러뜨리는 소리일 경우가 많습니다. 샐러리 줄기가 부서지면서 내는 날카롭고 수분감 있는 파열음의 '물리적 특징'이, 우리가 상상하는 '뼈가 부러지는 느낌'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뇌는 소리의 진짜 출처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지금 보고 있는 시각 정보와 들리는 청각 정보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묶이는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죠.


이 놀라운 '인식의 오류'는 우리 뇌의 결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뇌가 얼마나 유연하고 창의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착각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우리 뇌가 소리를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경험과 다른 감각들을 총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감각의 콜라보레이션: 뇌 안에서 우리의 감각들은 따로따로 일하지 않습니다.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며 정보를 주고받죠. 예를 들어, '바삭!'하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입안에서 무언가 바삭하게 부서지는 '촉감'을 함께 느끼곤 합니다. 감자칩 광고에서 유난히 바삭거리는 소리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청각이 다른 감각(촉각, 미각)을 깨워 더 풍부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교차양상 지각(Cross-modal Perception)' 현상이죠. '차가운' 금속성 소리를 들으면 정말로 서늘함을 느끼고, '따뜻한' 나무 소리를 들으면 포근함을 느끼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사진: Unsplash의Distinct Mind


경험이라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우리의 뇌가 이렇게 뛰어난 탐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방대한 양의 '소리-경험 데이터베이스' 덕분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문을 두드려보며 나무의 소리를 익혔고,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쇠의 소리를 배웠으며, 유리잔을 부딪치며 유리의 소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경험이 뇌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비슷한 소리를 듣는 순간 즉시 관련 정보를 불러내어 "아, 이건 나무 소리군. 단단하고 따뜻한 느낌이야"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소리의 물성을 느낀다는 것은, 지금 들리는 소리와 내 과거의 모든 촉각적 경험이 만나는 놀라운 순간인 셈입니다.



마무리, 그리고..


결국 우리가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공기의 진동을 감지하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소리라는 실마리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물리적 세계를 읽어내고, 내 안의 모든 경험과 기억을 동원해 그 의미를 재구성하는, 지극히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과정입니다. 우리의 귀는 세상을 만지는 또 하나의 손과도 같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귀와 뇌가 협력하여 소리의 물성을 느끼는지, 그리고 때로는 얼마나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지, 그 인식의 원리를 탐구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원리를 역으로 이용하여, 우리가 의도적으로 '소리의 물성'을 디자인할 수는 없을까?


2부에서는 영화 속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샐러리 줄기를 부러뜨리는 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들의 세계를 통해, 어떻게 하면 소리만으로 듣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지고 느끼게 만들 수 있는지, 그 창의적인 기술과 장인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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