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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MP3플레이어 속 음악들

지극히 주관적인 나만의 '고고학'이 창작의 재료가 되는 과정

by JUNSE

Sound Essay No.28

나의 오래된 MP3플레이어 속 음악들

지극히 주관적인 나만의 '고고학'이 창작의 재료가 되는 과정


oleg-sergeichik-Ebhh_t6tjo0-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Oleg Sergeichik


서랍 속에서 발견한 타임머신


방구석 서랍을 정리하다가, 먼지 쌓인 채 잠들어 있던 낡은 MP3플레이어나 CD플레이어를 발견한 경험, 다들 한 번쯤 있으신가요? 조심스럽게 충전기를 연결하고, 몇 년 혹은 몇십 년 만에 전원을 켜봅니다. 그리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통째로 잊고 있던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때의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지금 듣기엔 조금 촌스럽고 유치하게 느껴지는 그 노래들. 그것은 단순한 멜로디의 나열이 아닙니다. 독서실 가던 버스 안에서 매일 들었던 노래, 첫사랑과 헤어지고 펑펑 울며 들었던 노래,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목청껏 따라 불렀던 노래... 그 시절의 공기, 냄새, 감정까지 고스란히 압축해놓은 지극히 사적인 '타임캡슐'이죠.


우리는 종종 이런 과거의 기록들을 그저 과거의 일상으로 취부하며 흘려 넘기곤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 촌스럽고 유치해서 더없이 솔직했던 나의 음악 기록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최신 샘플 팩이나 가상악기도 줄 수 없는, 나만이 가졌던 그 스토리텔링을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독창적인 창작의 '원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플레이리스트는 ‘그때’ 나의 가장 솔직한 마음의 지도


annie-spratt-kZO9xqmO_TA-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Annie Spratt


지금 우리의 스마트폰 속에 담긴 플레이리스트는 어느 정도 '편집된' 자아입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세련된 취향, 전문가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이 섞여 있죠. 하지만 MP3플레이어나 CD 서랍장 속 플레이리스트는 다릅니다. 그것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던, 날것 그대로의 내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마음의 지도'와 같습니다.


감정의 하이퍼링크: 그 지도 위에 찍힌 노래들은, 특정 감정으로 직행하는 '하이퍼링크'입니다. 어떤 노래는 빛바랜 앨범처럼 아련한 그리움을, 어떤 노래는 이유 없는 반항심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의 치기를, 또 어떤 노래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풋풋한 설렘을 순식간에 소환해냅니다. 창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재료가 '진솔한 감정'이라면, 이 낡은 플레이리스트는 그 재료들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존된 보고(寶庫)인 셈입니다.


'촌스러움'이라는 이름의 진정성: 지금의 세련된 기준으로 보면 '촌스럽다'고 느껴지는 그 시절의 선택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선택들은 유행이나 타인의 평가를 따르기보다, 오직 나의 즐거움과 위로를 위해 존재했습니다. 왜 10대 시절의 나는 그토록 유치한 신시사이저 소리에 열광했을까요? 아마 그 소리가 가진 밝고 희망찬 에너지 때문이었을 겁니다. 왜 그 거친 기타 소리에 심장이 뛰었을까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뜨거운 열망을 대신 소리쳐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촌스러움'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그 시절 내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가장 순수한 감정의 핵과 마주하게 됩니다.



'소리 탐험가'가 되어 나의 과거를 발굴하는 법


element5-digital-uE2T1tCFsn8-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Element5 Digital


자, 이제 이 보물 지도를 손에 쥐었으니, 본격적으로 보물을 발굴하고 현재의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소리 탐험'을 시작해봅시다.


1단계: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듣기 (발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저 듣는 것입니다. 부끄럽다고 넘기지 말고, 유치하다고 비웃지 말고, 그 시절의 내가 되어 플레이리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세요. 중요한 것은 음악을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기억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는 것입니다. 노트에 메모를 해도 좋습니다. 단, 음악적 분석이 아니라 떠오르는 풍경, 사람, 감정의 단어들을 적어보는 겁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비 온 뒤의 흙냄새가 생각나.", "이 노래는 그 친구의 웃음소리 같아." 처럼 말이죠.




2단계: 내가 사랑했던 것의 본질 파헤치기 (분석)
이제 창작자의 귀로 다시 한번 들어봅니다. "그 시절의 나는 정확히 이 노래의 '무엇'을 사랑했던 걸까?" 하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촌스러운 신시사이저 소리의 '밝고 명랑한 음색'이었을까요? 거친 기타 리프의 '에너지 넘치는 질감'이었을까요? 서툰 보컬의 '솔직한 목소리 톤'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때 당시의 상황이 노래 전체를 통해 나에게 각인되었던 것일까? 지금의 내 시선으로 그때 내 마음을 움직였던 소리나 상황의 가장 작은 '성분' 혹은 '재료'를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3단계: 과거의 재료로 현재의 요리하기 (재해석)
마지막 단계는 발굴한 재료를 가지고 지금의 나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요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과거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경험을 '번역'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10대 시절 좋아했던 신시사이저의 '밝고 명랑한 느낌'이라는 본질을 가져와, 지금 내가 가진 세련된 악기와 사운드로 새롭게 표현해보는 겁니다. 그 시절의 록 음악이 가진 '날것의 에너지'를 빌려와, 지금 나의 비트에 녹여내는 것이죠. 혹은, 아주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던 내 목소리의 '지직거리는 질감' 자체를 샘플링하여, 음악에 시간의 흔적을 더하는 독특한 악기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그래서 그 어디에도 없는.


barthelemy-de-mazenod-uogMShrLlhU-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Barthelemy de Mazenod


이처럼 우리의 기억을 발굴하고,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은 창작을 위한 몇 가지 재료를 찾아내는 기술적인 작업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리 탐험'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단순히 쓸만한 샘플 몇 개를 건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잊고 있던, 어쩌면 지극히 주관적인, 나 자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지금의 내가 그때를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여정' 그 자체입니다.


플레이리스트를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때 그 노래들이 사실은 그 시절 나의 가장 솔직한 나의 대변인이었고, 흔하다고 여겼던 멜로디가 실은 세상을 향한 나의 가장 뜨거운 희망이었다는 것을요. 부족했던 그때의 모습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이 나만 알 수 있는 잔잔한 위로의 시간. 어설펐지만 진심이었던 과거의 나를 기꺼이 껴안아줄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이 시간 여행이 주는 가장 큰 감정적 선물일 겁니다.


그리고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중요한 '관점' 하나를 얻게 됩니다. 나의 평범하고 때로는 초라하기까지 한 개인사가, 사실은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독창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모두가 비슷한 것을 보고 듣고 배우는 시대에, 나만이 가진 고유한 기억의 조합이야말로 나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만들어주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정보, 혹은 깨달음이죠. 이는 막막했던 창작의 길 위에서 흔들리지 않게 나를 붙잡아주는 든든한 자신감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 낡은 MP3플레이어를 찾아 충전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 안에는 단순히 잊혔던 노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앞으로 만들어갈 모든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바로 가장 주관적이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을 당신만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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