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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May 23. 2022

세상의 끝에서 만나볼 수 있는 여섯 가지 현상들



세상의 끝에는 양들이 산다. 사람들이 잠들 때까지 세다가 가물가물 놓쳐버린 양들은 모두 이곳에 모인다.

까만 양이 베게맡으로 찾아가면 사람들은 악몽을 꾼다. 양이 울타리에 걸려 넘어질 때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에서 깬다. 장, 윤, 존이라는 이름의 양치기 소년들이 3교대로 양들을 관리한다. 그들은 세상의 끝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의 종점역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해 목장까지 간다. 양을 관리하고 돌아오는 시간 동안 소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느리게 나이를 먹는다.



목격되지 않은 순간

세상의 끝에는 아직 누구에게도 목격된 적 없는 순간들이 모여 있다. 그중 일부는 아래와 같다.

- 낡은 수도꼭지에서 마침내 물방울이 멈추는 순간

- 아무도 없는 과수원의 그늘 속에서, 한철 여름의 과일이 익을 대로 익어 땅에 떨어지기 직전의 순간

- 달에 찍힌 우주비행사의 첫 발자국이 마침내 지워져 사라지는 순간

- 나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던 청년의 정수리에서 첫 흰머리가 자라나는 순간

- 만원 지하철에 탄 두 사람의 헤드폰 속에서 우연히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위의 시간들은 제각각 다른 색깔과 크기의 조각으로 거대한 모래시계의 허리에 고여 있다. 그리고 최초로 목격되는 순간 현실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주크박스

세상의 끝에는 주크박스가 있다. 동전을 넣고 노래를 고르면 오래된 유랑 서커스의 입구처럼 색색의 전등이 켜지고 음악이 흘러나온다. 당신이 하루 종일 흥얼거리지만 절대 제목을 기억할 수 없는 멜로디는 십중팔구 이곳에서 왔다. 가끔 세상의 끝까지 흘러온 뮤지션들이 이곳에서 곡을 가져다가 가사를 입히고 제목을 붙여 세기의 히트곡을 만든다. 엘비스 프레슬리, 레이 찰스, 스키터 데이비스가 이곳을 즐겨 찾았다고 전해지나 명확히 밝혀진 사실은 없다. (참고: 바람*에게 물어볼 것.)



바람*

흔히들 세상의 끝에는 바람 한 점 없을 것이라는 오해를 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세상의 끝에는 '딱 한 점'의 바람이 있으며, 우는 소리를 내며 한 방향으로 분다. 당신이 세상의 끝을 방문하는 게 처음이라면 이정표 대신 바람을 따라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시간적인 세상의 끝
세상의 끝은 지리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시간적인 세상의 끝도 이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번호표를 뽑고 안전장비를 착용한 뒤 [세상의 끝]이라고 적힌 작은 방화문 너머로 들여다보면 된다. 세상이 끝난 광경이 담아내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주관적이며, 10분이 지나면 다음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다지 유쾌한 명소는 아니기에 대개 줄은 한산한 편이다. 평일 낮에 방문한다면 몇 번이고 연달아 세상의 끝을 감상할 수 있다.



기다림

세상의 끝에는 끝없는 기다림이 있다. 오지 않는 일행을 기다리며 쌓여간 커피잔, 재떨이의 담뱃재, 전화 수신음을 들으며 그린 볼펜 자국, 경의중앙선을 기다리며 서성인 발들의 궤적, 분실된 해외배송 택배 문의 요청, 편지의 답신을 기다리며 붕 뜬 시간들이 쌓여있는 방이 있다. 이 모든 흔적을 기다림의 대상에게 배송해줄 우편배달원의 방문 수거가 예정되어 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 도착하지 않을 것이 우편배달원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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