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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Apr 09. 2022

지상의 밤


그 무렵 나는 극작가가 되고 싶었다.

뉴욕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꿈은 크고 지갑은 비어 있었던 나는 낮에는 글을 쓰고 저녁에는 택시를 몰았다. 또래의 다른 여자 친구들은 호텔에서 이불을 개고 식당에서 주문을 받는 일을 했지만, 나는 운전대를 잡는 게 좋았다. 밤새 미터기를 돌리며 달리다가 새벽이 되면 정류장에 차를 반납하고 14번가의 운전자 식당으로 갔다. 그리고 창가 자리에 앉아 뜨거운 45센트짜리 커피를 앞에 두고 글을 썼다. 택시 운전은 전업 극작가가 되기 위한 초보자 코스와도 같았다. 지독하게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날 밤은 한바탕 비가 내린 뒤라 길에 손님이 많지 않았다. 낮의 열기에 덥혀진 도시 위로 즐거운 비명처럼 쏟아지는 그런 소나기였다. 우산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종종걸음으로 기다리는 부인들 몇 명을 태우고 도심을 오가다 보니 어느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나는 14번가의 운전자 식당의 네온사인 옆 갓길에 차를 세우고 수첩을 열었다. 극 중간쯤에서 주인공이 던질 농담의 펀치라인을 적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택시 뒷문이 훌쩍 열리더니 무언가 우당탕탕 굴러들어 왔다. 정장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허둥지둥하는 몸짓이 전혀 신사답지 않았다.

나는 수첩을 닫고 펜을 스프링에 끼워 넣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불청객은 말 대신 가쁜 호흡만 내쉬었다.

밤이 깊지도 않았는데 벌써 인사불성이구만. 운전대 사물함에 처박아 놓은 기사 매뉴얼 틈에는 주정뱅이나 약쟁이 승객들을 위한 지침이 있었다. 나는 매뉴얼을 꺼내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 좋은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 그 당시 나는 글을 위해서라면 이렇게나 무모했다 - 또 하나는 백미러로 마주친 손님의 눈빛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키우던 집토끼를 우리에서 꺼내 안아올리면 벌렁거리는 심장박동과 함께 나를 바라보던 겁에 질린 눈이었다. 뒤쪽 사거리 너머에서부터 비에 섞인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터기를 눌렀다. 그리고 더 묻지 않고 출발했다.

미끄러지듯이 신호를 통과해 달렸다. 사이렌 소리를 어느 정도 따돌린 듯 하자 나는 백미러로 눈을 돌려 내 택시 안으로 굴러들어온 불청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순간 등골이 쭉 섰다.

‘사람이 아니잖아?’

이마는 너무 높았고, 피부는 백금처럼 반짝거렸고, 깊이 패인 눈구멍 속의 커다란 눈으로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는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단 사람의 캐리커쳐에 가까웠다. 타임 스퀘어에서 길거리 예술가들이 잔돈 몇 푼으로 그려 주는 그런 초상화들 말이다. 나사 (NASA)의 달 착륙 성공 소식 이후로 끝없이 타블로이드지를 채우는 외계인 삽화 같기도 했다. 그래, 그 편이 가깝겠군. 그렇게 뒷자리에 외계인 손님을 태우고 보내는 밤이 시작되었다.


난감한 상황일수록 말이 없어지는 사람이 있고, 평소보다 더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후자인 편이다.

“손님, 뉴욕은 처음이세요?”

"..."

“아하. 제가 맞춰 볼게요. 사업차 방문하셨죠? 영업이나 부동산 쪽 일이실까요. 근사한 집과 멋진 부인이 있을 수도 있겠는걸요. 저희 부모님도 저한테 결혼을 하라고 난리예요. 근데 관심이 있어야 말이지요. 밤마다 택시를 몰고 다니면 사람 만날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기 딱 좋지요. 손님처럼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경우 빼고요.”

손님은 여전히 겁에 질린 눈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센트럴 파크는 가보셨어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요? 거기 꼭대기 전망대까지 올라가려면 1층에서 오십칠 센트를 내야 하는데, 검표하는 직원이 점심 전에 꼭 담배를 피우러 나간단 말이죠. 그때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86층 전망대까지 쭉 올라가면, 공짜로 도시 전경을 볼 수 있어요. 대신 경비원 퇴근시간 전에는 내려와야 해요. 아니면 옥상에 갇히니까요.”

사이렌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도심 외곽으로 가는 지름길을 탄 덕이었다.

“이제 안 쫓아오는 것 같네요.”

잠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갑작스러운 정차에 손님은 놀라서 모자를 움켜쥐었다.

“여봐요, E.T. 씨, 죄송하지만... 목적지를 말씀해주시지 않을 거면 내리셔야 해요. 밤새 태우고 이렇게 달릴 수는 없거든요. 지낼 곳은 있으세요?”

내 말을 알아듣는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지만, 쫓겨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내 목소리에서 감지한 것인지 외계인 손님은 좁은 차 안에서 두리번거리며 딴청을 피우다가 빈 손목으로 시계를 보는 척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어디서 보고 배웠어요?”

손님도 이내 웃었다. 같이 웃었기 때문에 이젠 쫓아내려야 쫓아낼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좋아요. 안전하게 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알아요. 투어 가이드처럼 모셔드리죠.”

차를 몰고 미드타운으로 향했다. 밤의 군상과 요란한 네온사인, 24시간 거품을 내며 굴러가는 빨래방의 세탁기들이 빗길 웅덩이 속에서 번쩍이며 앞길을 밝혔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속도를 줄이고 낡은 건물의 입간판 바로 앞에 차를 세웠다. 전구가 망가진 계단을 따라 올라 작고 어두운 극장 벽을 짚고 조심조심 앞으로 이동했다. 손으로 붙인 듯한 포스터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무성영화의 밤]. 영화는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목요일 저녁치고는 관객이 꽤 많이 모인 편이다. 시인들, 빈털터리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들, 불면증에 빠진 연인들, 그리고 극작가 지망생들... 방해받지 않고 꿈꾸기 위해 야간 극장에 모인 아름다운 관객들의 얼굴 위로 낡은 영사기가 털털거리며 빛을 쏘았다. 스크린 속에서는 정장을 입은 주인공이 먼지를 날리며 우스꽝스럽게 전력질주하고 있었다. 그를 뒤쫓던 강도들이 달려드는 바로 그 순간, 주인공은 옆에서 달려오는 트럭의 짐칸에 매달려 깃발처럼 휙 사라졌다. 강도들은 빈 도로에서 우르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극장에 폭소가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 소리내서 웃다가 문득 손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두려워하는 표정은 가시고 스크린의 빛을 함뿍 받으며 아이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몸을 기울여 그에게 말했다.

"언젠가 이런 각본을 쓸 거예요."

알아듣는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말 어려울 거예요. 말이 필요 없는 일이니까.”

손님의 어깨를 빌려 잠이 들었기 때문일까, 꿈을 꾸었다. 택시를 몰고 밤하늘을 달리는 꿈이었다. 앞유리를 향해 쏟아지는 빗줄기가 헤드라이트 빛을 받아 성단(星團)처럼 반짝였다. 열린 창문  옆에서 비에 젖은 밤공기가 밀려들어왔다. 타이어가 노래를 불렀다. 위험과 슬픔이 주인공을 모두 아슬아슬하게 비껴 가는 흑백 무성영화 속의 세상이었다.

잠에서 깨니 청소부가 빗자루로 극장 앞을 쓸고 있었다. 손님은 온데간데없었다. 극장 계단을 오르며 꿈의 기억을 털어내고 어느새 환히 밝아진 거리로 걸어나왔다. 택시 유리창에 끼워진 불법주차 딱지가 나를 반겼다. 나는 천천히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차를 몰고 14번가로 돌아갔다. 운전자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침 신문을 샅샅이 훑었지만, 미확인 비행물체나 정장 차림의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나는 밤마다 택시 창문 너머로 외계인 손님의 모습을 좇았다. 그러나 거리의 네온 틈에서도, 처음 그를 만났던 14번가 골목에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청객이 택시 뒷자리로 뛰어들어오는 일도 더는 없었다. 이내 나는 모든 게 하룻밤 꿈이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방 벽에 붙여 두었던 주차 딱지도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내가 외계인 손님을 잊은 뒤로도 한동안 손님은 야간극장의 세계를 잊지 못했던 듯하다. 몇 주간 신문 한구석에는 뉴욕의 심야영화 상영관에서 벌어지는 알 수 없는 이유의 정전 해프닝들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 그리고 훨씬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각본 작업을 위한 자료조사를 위해 공공도서관 아카이브를 방문했다가 묘한 법정 수사 기록 한 토막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하 녹취 내용을 글로 옮김

1967년 6월 8일.

뉴욕의 찰스 E. 팩스턴 경위 (이하 P)와 자문위원 제럴드 스턴 박사(이하 S)의 대화 녹취

P: 어떻게 눈앞에서 목표물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건지 설명해 보시오. 닫힌 극장 안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게 말이나 되는지.

S: 시간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매체는 한 가지밖에 없지요. 용의자는 화면의 컷과 컷 사이로 도망친 겁니다.

P: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녹취를 종료하겠소.

S: 제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필름을 보시지요. (그는 셀룰로이드 필름의 타버린 구간을 가리켰다.) 시간과 공간은 곧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론은 경위님도 들어보셨을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바로 몇 년 전에 노벨상을 받은 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도 그런 아이디어니까 말이죠... 아무튼 영화관 스크린 속에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잘라 뒤바꾸어놓고, 순식간에 할리우드의 선셋 대로에서 대서양 한가운데로 이동합니다. 극장에 모인 관객 모두가 뇌의 시냅스를 동원해 무의식적으로 시공간의 단절과 재결합을 만들어내는 순간, 극장 안에서 마법 같은 찰나의 무언가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부정하진 않으시겠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려는 말은,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아주 극히 일부분만을 이해할 뿐이라는 겁니다. 영원이 곧 한순간이고, 시간은 공간 사이를 잇는 통로일 뿐이라는 점에 대해. 그 통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존재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절대 그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녹음 끝.


긴 영화 같은 10년이 흘렀다. 나는 새로 쓴 대본으로 성공적인 테스트 스크리닝을 마치고 작업실로 돌아가려는 차였다. 엘리베이터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여 있던 극작가 지망생 몇 명이 사인을 요청해왔다. 필기구를 찾아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어디선가 백금처럼 반짝이는 긴 손가락이 펜을 건네주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 학생 한 명이 시야를 가리며 얼굴로 책을 내밀었다. 황급히 서명을 해준 후 출구 쪽을 바라보았지만 말쑥한 정장 차림의 누군가가 소극장 뒷문으로 사라지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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