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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May 08. 2022

종점역

지하철 터널 안쪽 먼 곳에서부터 찬바람이 불어왔다.

둥글게 굽은 터널을 따라 붙은 광고를 올려다보았다.


차이나타운에 새해 쇼를 보러 오세요.


열차는 흔들거리며 달렸다. 종점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적어지더니 어느덧 칸에는 서너 명의 승객만 남았다.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제각각 확신에 찬 방향으로 걸었다. 갈 곳을 모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곧 플랫폼은 텅 비었다. 방향을 정하고 플랫폼 밖으로 나오자 사방이 희었다. 눈이 왔다가 녹기를 반복했는지 바닥이 미끌미끌해 발끝에 힘을 주고 걸었다.

종점에 왔을 뿐인데 세상 끝에 온 것 같았다.

걷다 보니 금방 손이 얼었다. 추위를 잠시 피해 프렛*에 들어왔다. (*Pret A Manger. 이곳에는 도시 어디에나 프렛이 있다.) 시원시원하고 친절한 눈의 인도계 직원이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으며 묻는다. "어디서 왔나요?" 무심코 나는 '서더크요*' 하고 대답한다. (Southwark*. 런던 중부의 지구) 직원은 무안한 듯 웃어주더니 커피를 내리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녀의 질문에 맞는 답변은 사우스 코리아나 서울, 재팬, 도쿄 또는 "여기서 태어났어요"같은 대답일 것이다. 강남에서 외국인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는 데에 종로구에서 왔다고 대답한 격이니 나도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시에 사는 기간 동안 나는 많은 공을 들였다. 마트에서는 물건 이름을 하나씩 외우고 정거장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려고 지하철 안내 방송에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유치한 일이거니와 그건 내가 도시에게 보일 수 있는 성의였다. 내가 성심성의껏 도시를 사랑하자 도시도 답례로 나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 주었다. 시장에서 덤으로 얹어 주는 복숭아처럼, 좋은 사람들이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삼백 명이 넘는 군중 속에서 우연히 울산에 살다 온 프랑스인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도서관 앞에서 비둘기에게 빵을 던져주기도 했고, 잔돈을 한움큼씩 쥐고 수백 가지 맛의 티백을 낱개로 파는 가게에 가서 '제일 맛없는 차'를 고르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하기도 했다. 나이가 지긋한 동유럽계 할아버지와 수업 전 복도에서 영화 얘기를 하고 커피를 얻어마시곤 하기도 했다. 자주 가는 식료품점에서 계산할 때마다 나를 기억하고 캔디바를 하나씩 챙겨주는 직원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도시에서 나는 자꾸 사람을 잃어버렸다. 마트에서 잔뜩 본 장을 장바구니 없이 들고 가려하는 것처럼 자꾸 팔 틈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놓쳤다. 그러면 때로 사람들은 참을성 있게 나를 기다리거나, 오래오래 멀리 돌아와 다시 나를 찾아와주기도 했다.


손을 녹이고 카페에서 나오자 어느새 길 곳곳에 눈사람들이 생겨 있었다. 어린이들은 이미 한바탕 눈싸움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간 것인지 사방은 이상할만치 하얗고 고요했다.


도시의 지하철 안내 홈페이지에서는 모든 역의 시간대별 플랫폼 혼잡도를 실시간 기준 과거, 현재, 미래로 안내한다. 처음 정보 페이지에 접속해 들어갔을때 그 말투와 표현이 특이해 여러 번 읽고 기억해 두었다.


- 이 역은 지금 조용합니다.
- 현재는 평소보다 더 조용합니다.
- 곧 더 북적이게 될 것입니다.


곧, 더 북적이게 될 것입니다.

밤, 사람들이 북적이는 틈에서 나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갤러리에 있었다. 어떤 시인의 낭독회가 열리는 저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겨울 눈보라가 치는 도시, 그리고 빨랫줄에 걸린 어머니의 속옷에 대한 긴 시였다. 시인은 담담하고 텅 빈 눈으로 시를 낭독했다. 행사가 끝나자 모두 플라스틱 와인잔에 샴페인을 들고 무리 지어 떠돌았다. 낭독회를 주최한 교수가 나를 알아보고 옆으로 불렀다. 양복 입은 서너 명의 중요해 보이는 남성들이 둘러서 있었다. "OO도 좋은 시인이예요..." 교수가 나를 그렇게 소개하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창밖으로는 해가 져 바깥이 깜깜했다. 까만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OO도 좋은 시인이예요..."

다시 겨울, 잔돈을 건네며 계산을 하자 점원은 웃으며 캔디바를 덤으로 건네주었다. 짙은 빨간 포장지에는 '크리스마스 에디션'이라고 적혀 있었다. 방에 돌아와 코 밑에 대고 포장지를 까자 알싸한 생강과 시나몬의 향기가 올라왔다.


몇 년이 흐른 뒤, 구글어스에서 도시의 종점역을 검색해 위성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부실 만큼 쨍한 여름의 풍경이었다. 나는 그곳을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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