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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Nov 17. 2022

11월은 목요일 같은 달

눈을 뜨자 흐린 날이었다. 돌아보면 기억 속 11월은 대체로 이렇다 (실은 맑았던 날도 많겠지만)

하늘이 멀리까지 쭉 흰빛이었다. 누군가 도시를 만들고 나서 지평선 위로 색을 채워 넣는 걸 잊은 것처럼 보였다. 건물들도 유독 점잖게 가라앉아 그 사이로 쌩쌩 지나는 도시의 소음이 새삼스럽게 들렸다. 우유를 탄 듯 묽은 회색빛과 길에 쌓인 낙엽의 붉음이 잘 어울린다. 플라타너스 낙엽은 마른 피 같은 색을 띤다. 이런 날을 가을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아니면 가장 가을다운 날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나 좋으니 누군가와 마주 앉아 종일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머릿속 이름 없는 공간에서 뛰어다니는 작은 악마의 발소리를 모른 척하며 농담을 하고 웃기도 할 것이다.

11월은 1년 중 목요일 같은 달이라고 하던데

정말 그렇다. 또한 연옥 같은 달이기도 하다.


아침을 만드는 것들의 목록

1. 누워서 올려다보는 창밖으로 휙 날아가는 새

2. 덜컹거리는 버스의 소리

3. 커피를 내리기 위해 물을 끓이는 소리

4. 간밤에 쌓인 휴대폰 알림과 이메일

5. 다 마르지 않은 감은 머리의 샴푸 냄새

6. 새벽에서부터 떠내려와 조금씩 데워지는 공기

7. 늦잠과 이른 출발 사이의 무게 재기

8. 간밤 널어놓은 빨래들의 가만한 형체

9. 짧은 고요

10. 꿈과 현실의 다소 흐릿한 경계 (그리고 그것들을 확인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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