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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Jun 12. 2021

시간 여행을 하는 나에게 보내는 편지



시간 여행은 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을 걷는 것과 비슷해. 옆에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손을 대거나, 뭔가를 가지고 나오는 건 금지. 어렸을 때 투어가이드에게 들었던, 신발에 동굴진주를 몰래 숨겨 왔다던 사람 이야기가 생각나니? 그렇게 규칙을 어기는 시간여행자들이 한두 명씩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기억상실이 생기고 미제 사건들이 생기는 거라니깐.


아무튼 이번 여행에서 나는 지구의 탄생도 보았고 우주의 끝도 보았어. 마틴 루터 킹의 연설 자리에도 있었고, 화성에 생긴 첫 신도시 준공식도 인상 깊게 봤지.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단체 관람한 후에 개인 여행시간으로 주어진 24시간 동안은 너의, 그러니까 나의, 인생을 여행했단다.


행복했던 순간들을 찾아 재방문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 빛나는 책갈피처럼 노랗게 타오르고 있었거든. 2015년 바르셀로나, 친구 집에서 먹고 자며 지내다가 혼자 해변으로 걸어 나와 새파란 바다를 보며 햇빛을 쬐던 너. 2017년, 파도가 사람 키만큼 높게 치는 북해의 검은 모래 해변에서 꽁꽁 언 손으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이곳의 모든 것이 신기하다고 웃던 너. 2018년. 황금빛으로 노을 지는 다리 위에서, 갈매기에게 빵을 던져주던 아저씨 덕분에 모여든 수십 마리 새들의 비행을 넋을 놓고 올려다보던 너.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노래를 하고, 음식을 나눠 먹고, 꼭 끌어안고 헤어졌던 너의 표정들은 참 서로 닮아 있었다. 반딧불이가 그린 그림처럼. 아마 고정된 시간 속의 너도, 눈을 감으면 그 순간들이 눈꺼풀 안쪽에서 어른거리지 않을까.


그런가 하면 쉽게 손이 가지 않는, 블랙홀처럼 까만 순간들도 보였어. 시내버스만 타면 과호흡 증상이 밀려와서 숨도 잘 쉬지 못했던 때가 생각나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봄이 가는 게 무서워서, 거리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조차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피하며 걸었던 모습도 기억나는지. 수많은 선택지와 갈래가 미로처럼 이어져 있을 거라고 자주 말하던 너, 그 미로 속에서 잘못된 문을 열어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서면 어쩌지 불안해했던 어느 4월의 너는 아주 작고 외로워 보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앞뒤로 지나쳐가면서 나는 이제야 알게 돼. 인생은 너를 집어삼키는 미로가 아니라, 네가 하나씩 조약돌을 놓으며 만들어가는 긴 다리라는 것을. 길게 이어진 이 삶을 마디마디로 끊어내서 필름처럼 서로 맞대서 보여줄 수 있다면, 아마 얼마나 서로 닮아 있는지 놀랄 거야. 혼자 불안해하던 날들마다 사실 너는 얼마나 의연한 모습으로 그 일을 해내고 있었는지.


여행 종료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니 몇 마디만 더 적을게. 첫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다고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 (이번 여행에서 세상의 끝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는데, 확언하는데 그건 네 탓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보다 더 크게 소리쳐도 돼. 원하는 것을 더 요구하고, 원치 않는 것은 더 거절하면서 말이야. 둘째, 아름다운 순간들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 작고 소박한 행복조차도 완전히 같은 모양으로 반복되는 것은 없어. 한순간 찾아왔다가 빠르게 사라진단다.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더 크게 웃고, 팔을 흔들며 걷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기를 바래. 좋은 글을 읽으면 밑줄을 긋고, 맛있는 음식에는 엄지를 들어 올리고, 감동적인 연극의 끝에는 더 크게 박수를 치렴.


또다시 밝게 타오르는 순간들도,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아픈 일들도 네 시간 속에 기다리고 있어. 그때의 네 손을 잡아주는 건 여행자 규정에 어긋나지만, 마음에서 울컥 뜨거운 느낌이 든다면 지금의 내가 보내는 포옹이라고 생각해주길 바래. 그리고 눈을 감고, 눈꺼풀 안쪽에서 빛처럼 어른거리는 순간들을 꺼내보기를. 

네가 만들어 온, 너만의 기억들로 이어진 이 길은 얼마나 멋진 여행인가. 그리고 너를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북해의 해변에서, 런던의 다리 위에서, 당장이라도 벚꽃이 흐드러질 것처럼 봉오리가 맺혀있는 도쿄에서. 그리고 지금의 너는 아직 가보지 못한 세상의 모든 곳과 모든 행복했던 순간들에서. 한순간 동시에, 이 편지를 보내.




*개인 및 집단의 이익을 위한, 군사적인 목적을 위한 정보 공유는 국제 시간여행 연맹 제5조에 의해 금합니다.

서명, 여행자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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