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스럭 Jul 09. 2022

미델하르니스의 길

아주 오래전, 어린이를 위한 명화 책에서 어떤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뒷짐을 진 남자가 가로수길을 걷는 그림이었다. 어린 눈에 보기에도 그 가로수들은 어딘가 이상했는데, 잎이 무성한 맛은 하나도 없이 키만 기다랗게 자라서 길 양 옆을 갈비뼈처럼 감싸고 있었다. 한 뼘의 그늘도 만들어주지 못하는 비리비리한 나무들 대신 하늘에는 두툼한 뭉게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명화 책을 다 읽은 후에는 한 번도 그 이상한 나무들과 산책하는 사람을 그린 그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20년이 흘러, 샤워부스에서 물을 맞으며 머리를 감던 중 난데없이 그림이 머릿속에서 다시 연기처럼 떠올랐다.

석회 함량이 높은 물로 샴푸를 헹궈내며 나는 생각했다. 그 그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화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이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유명한 명화들은 세계 각국의 미술관들이 나눠가지고 있으니까. 어느 먼 나라 국립미술관의 벽에 걸려 있다면 바게트를 먹거나 카이막을 먹거나 바움쿠헨을 먹던 관광객들이 손에 묻은 가루를 툭툭 털고 들어와 그림을 바라볼 것이다. 누군가의 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어 특별전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만 반짝 세상에 공개되거나, 혹은 누구도 볼 수 없는 수장고의 어둠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림 생각을 하다 보니 당장 내셔널 갤러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잠그고 욕실을 나왔다.

걸어서 내셔널 갤러리까지 갔다. 아이들을 무등 태운 아버지들과 광장 바닥에 분필로 만국기를 그리는 사람들과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 둔 노숙자들을 지나쳤다. 돌계단을 올라 무거운 회전문을 밀고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둥근 아치형 천장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소리를 더 엄숙하게 만들었다. 나는 성모 마리아들과 그리스 신들과 항구 풍경과 궁정화 사이를 잠시 헤매다가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마법처럼 그림은 그곳에 있었다.  곳에서부터 가슴이 뛰었다. 벽에 걸린 다른 풍경화들을 빠르게 지나쳐 그림 앞에 섰다. 이상하게 눈물이   같았다. 처음 명화책에서 보았을 때는 그림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림이 먼저 나불렀으니까. 나는 눈물을 참으며  발짝  발짝 그림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법은 어렵지 않다. 그림의 완벽한 정중앙에 서서 심호흡을 하면 캔버스 속으로 들어가는 틈이 보이는데,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나는 오래   비법을 TV 다큐멘터리에서 터득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던 , 나 명화 책의 페이지 아래쪽에  그림에 대한 부연설명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1 소실점과 투시 원근법의 교과서와도 같다…..” 그렇지, 그림  행인들은 소실점 속으로 걸어가고 있구나! 끝없이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완벽히 사라질  있게  것이다.

나는 한동안 그림 속을 질릴 때까지 걸었다. 두툼한 뭉게구름들이 만드는 그늘 아래를 걸으며 양 옆 채소밭의 고소한 흙 냄새를 맡았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산책자의 큰 개도 쓰다듬어 주었다. 소실점의 바로 코앞까지 발자국을 찍고 난 뒤 반환점을 그리듯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다시 그림 밖으로 나와, 1층까지 계단을 타고 내려가 갤러리의 묵직한 회전문을 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뒤 나는 노트를 펼치고, “완벽히 사라질 수 있는 방법” 목록의 17번 항목으로 [미델하르니스의 길]을 기록해 두었다.



이전 16화 시튼 솜즈의 일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