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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Jun 04. 2021

시튼 솜즈의 일생

시튼 솜즈는 도시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서른을 앞둔 나이에 그는 벌써 자기 집이 있었고 손을 대는 사업마다 승승장구했다. 매일 아침 그는 2층 발코니에서 아침 공기를 맞으며 환기를 했다. 완벽한 식사를 하고, 꼭 맞는 구두를 신고 매일 같은 길을 따라 산책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의 말쑥한 구두코에서 맞춤 정장으로, 그리고 손목에 아름답게 잠겨 있는 시계로 흘렀다. 그러나 시튼 솜즈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건 표정이었다. 그건 힘쓰지 않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자판기에서 콜라 버튼을 누르면 콜라가 나오듯이, 세상은 그에게 쉽게 친절을 내주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에게 외치곤 했다. 솜즈 씨, 오늘도 건강해 보이시네. 천사가 어깨 너머에서 지켜보나 본데! 그러면 그는 예의 힘쓰지 않는 표정으로 웃음으로 화답했다.

반면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들의 평균을 내어 본다면 시튼 솜즈가 사는 도시는 인근 다른 지역보다 불운한 편에 속했다. 하수 시스템이 자주 고장 났고 버스들은 종종 길에 멈춰 섰으며 폭풍우가 칠 때마다 낙뢰 사고가 잦았다. 뒤숭숭한 분위기 탓인지 도로에서는 자주 접촉사고가 일어났고 골목의 그림자 속에서는 좀도둑들이 행인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훔쳤다. 하수 처리반도, 엔지니어도, 임기마다 새로 취임하는 시장도 도시를 고쳐 놓는 법에 대한 뾰족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딱 서른이 되던 날, 시튼 솜즈는 여느 날처럼 말쑥한 맞춤 정장을 입고 광장을 향해 걸었다. 햇살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부드러운 손수건처럼 그림자를 드리웠다. 건물들이 내걸어놓은 차양막의 그늘을 따라 걸으며 시튼 솜즈는 아이를 사이에 끼고 밥을 먹는 가족과 카메라를 목에 건 관광객 무리를 지났다. 찌푸린 얼굴로 흥정을 하는 사람들, 경찰과 목소리를 높이며 실랑이하는 패거리도 지났다. 이윽고 볕이 잘 드는 노천카페에 도착했을 때, 시튼 솜즈는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는 천사를 발견했다. 천사는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받쳐 들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혼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태연해 보여, 그는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맞은편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천사는 말했다.

"늦지 않고 찾아오셨네요. 매일 여기를 지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저를 아시나요?"

시튼 솜즈가 물었다.

"그럼요, 솜즈 씨는 제 관할인데요. 독점계약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고요."

"무슨 말씀이시죠?"

"불운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일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천사가 한 사람을 단독으로 맡는 경우는 없어요. 원래 도시의 시민 전체를 고르게 챙겨야 하는 일입니다만, 전산 오류가 있었지요... 솜즈 씨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제가 쭉 독점으로 지켜봐 드렸으니까 아주 집중적으로 운이 좋았던 30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시튼 솜즈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무튼 오늘 만남을 잡은 건 은퇴한다는 말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는 탁자 너머로 브로슈어를 하나 내밀었다. 푸른 지중해 너머로 돌산과 흰 지붕의 집들이 늘어져 있는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었다. 시튼 솜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코팅지에 인쇄된 쨍한 푸른색과 흰색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멋지죠? 그리스 어디래요. 은퇴 휴양지로 아주 좋은 곳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떠나지만 여기서부터는 솜즈 씨 혼자서도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브로슈어를 다시 챙기며 천사가 이야기했다. 참새 두 마리 정도 크기의 두꺼운 크림색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마지막 한 모금을 넘겼다.

“너무 걱정 말아요.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것뿐이에요.”

그 말과 함께 사방이 하얀 빛에 휩싸였다. 천사의 형태는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파라솔 그림자 아래에는 빈 커피잔과 컵받침, 각설탕 가루만 남았다.

둔탁한 파열음에 시튼 솜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람 빠진 축구공을 힘껏 차는 소리였다. 공을 잡으러 가려던 어린아이가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후의 따스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광장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어진 탓인지, 서늘한 기운이 그의 목덜미에 거미줄처럼 옮겨 붙었다. 광장 모퉁이를 지나 대로변에 선 순간 시튼 솜즈는 살면서 처음 느끼는 불안에 휩싸였다. 평생 끼고 있던 헤드폰을 벗어놓은 것처럼 도시의 소음이 한순간 그를 덮쳤다. 길에 앉아 사납게 동전을 튕기는 행인들, 술취한 듯이 위험하게 달리는 자동차들, 지나치는 골목마다 꿈틀대는 그림자들이 모두 그를 노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던 시튼 솜즈는 무작정 길로 뛰어들어 달려오던 택시를 잡아세웠다. 택시의 라디오에서는 연이어 속보가 흘러나왔다. 좀도둑의 공격으로 응급실로 이송된 집주인, 목이 그어진 채 발견된 슈퍼마켓 주인, 갑자기 나타난 씽크홀에 빠진 소년... 물밀듯이 들려오는 사건사고 소식을 들으며 백미러 너머로 목적지를 묻는 운전기사의 눈빛마저 험악해 보였다. 택시가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입 안에서 신맛이 났다. 집이 가까워지자, 그는 지갑의 내용물을 통째로 던져주다시피 기사에게 건네고 차에서 도망쳐 내렸다. 옷이 식은땀에 푹 젖은 채로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다. 

집은 아침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불을 켜자 아침에 먹다 남은 채로 두고 간 샌드위치, 흐트러진 옷가지, 반듯하게 늘어선 도자기 인형과 오르골들이 장식장에서 반짝였다. 그때 1층에서 부스럭,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그가 서른 평생 문을 제대로 잠근 적 없다는 사실이 공포처럼 다가왔다. 집에는 호신용기는 물론 야구방망이 하나 없었다. 손이 닿는대로 식탁 위의 빈 술병을 방망이처럼 잡아 쥐었다. 덜덜 떨리는 손에 호신은커녕 병을 발등에 떨어뜨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시튼 솜즈는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창문 앞에 드리워진 커튼이 흔들렸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커튼을 젖히자, 창틀에 앉아 있던 고양이가 훌쩍 뛰어내려 나른하게 쭉 기지개를 켰다. 고양이가 그의 다리에 몸을 비비는 동안 시튼 솜즈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오래된 나무가 쓰러지듯이 천천히 바닥으로 몸을 숙였다. 그는 카페트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꼬박 이틀 동안 아름다운 솜즈 저택의 2층집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다시 집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여느 때처럼 말쑥한 정장과 광이 나는 구두를 신고 아름다운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표정이었다. 어딘가 달라 보이는 시튼 솜즈의 모습에 아마 오후의 햇빛 때문일 거라고, 거리의 볕 좋은 구석에 앉아 구두를 닦던 소년은 생각했다.

천사의 말대로 시튼 솜즈는 계속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다만 생활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집에는 3중으로 된 게이트와 최신식 경비 시설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어서 건강보험과 운전자보험, 상해보험, 화재보험, 의료보험을 들었다. 무수한 보험 설계사들과 경호업체와의 인연은 값비쌌지만 한편으로는 개인 사업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시튼 솜즈가 예전의 표정을 되찾는 데는 서른 살 생일로부터 30년이 더 걸렸다. 힘쓰지 않는 미소와 여유로운 눈빛은 머리가 희끗해지며 함께 찾아왔다. 행인들은 다시금 그가 지나칠 때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고, 마음속으로 감탄을 보냈다. 30년 사이 도시의 운세도 조금씩 나은 쪽으로 변해갔다. 하수구가 막히는 일도, 좀도둑의 폭력으로 행인이 크게 다치는 일도 점점 줄었고 범죄율 곡선도 완만히 아래로 기울었다. 이윽고 시튼 솜즈의 도시는 여느 다른 도시처럼 크리스마스마다 골목마다 시장이 열리고 캐롤이 울리는 곳이 되었다.

만 60세가 되던 해, 시튼 솜즈는 그리스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공항에서 내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올라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가장 높은 언덕 꼭대기의 노천카페에서 천사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에스프레소 잔을 받쳐 든 모습이었다. 시튼 솜즈는 천사에게 커피를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리고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에게 물을 한 잔 부탁했다. 천사는 무료해 보였다. 문득 30년 전 파라솔 아래에서의 표정도 그랬음이 스냅사진처럼 스쳐갔다.

"은퇴는 만족스러우신가요? 조금도 변하지 않았네요." 시튼 솜즈가 말을 건넸다.

"당신이야말로 예전과 똑같은데요." 천사가 답했다.

"나는 이제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사실 저희는 봐도 차이를 잘 알 수가 없어서요."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천사에게 문득 물었다.

"담배를 피우시나요?"

천사는 살짝 웃었다.

"아뇨."

시튼 솜즈는 잠시 자신의 30년 된 건강보험을 생각했다. 그리고 말쑥한 정장의 앞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내쉬었다. 노인과 천사는 언덕에 앉아 푸른 지중해를 내려다보았다. 햇빛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조용한 풍경이었다. 먼바다에선 통통대며 달려가는 어선이 일으킨 물보라가 흰 거품을 내다가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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