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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Mar 26. 2022

토성의 맛

꿈 연작



언제인가부터 P는 행성을 통째로 삼키는 꿈을 꾸었다. 천천히 수영하듯이 우주 속을 밀고 나가, 두 팔을 뻗고 입을 벌려 부유하는 가스층으로 된 행성을 빨아들였다. 뱃속이 행성을 이루는 가스로 가득 차면 몸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잠에서 깨면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굴러 나와 이를 닦았다. 예의 꿈을 꾼 날이면 시큼달큼한 맛이 혀뿌리를 감쌌다. 맛을 헹궈내기 위해 연거푸 P는 찬물을 머금고 뱉었다. 그리고 머리를 빗고, 구두를 신고 회사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면 밤이었다. 밤의 빈집은 아침의 빈집과는 다른 멀뚱한 얼굴로 퍼져 앉아 그를 맞이했다. 다섯 평 남짓한 오피스텔의 냉장고, 가스레인지, 세탁기는 공중으로 떠오를세라 단단히 벽에 붙들려 있었다. 뱃속과 방 안을 가득 채운 고요 속에서, P는 허기를 끌어안고 밤새도록 행성을 생각했다. 꿈은 매일 더 생생해졌다.

*나사의 과학자들은 여러 우주인들의 증언과 헬멧, 작업복에 배어있는 향을 토대로 “우주의 냄새”를 분석해냈다. 우주를 이루는 냄새는 다음과 같다. 쇠를 녹이는 토치 끝에서 나는 달큼하고 뜨거운 냄새, 총끝에서 피어오르는 화약 냄새, 그을린 스테이크 냄새, 여름날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패드 냄새, 호두와 산딸기가 섞인 럼주, 그리고 아주 살짝 태운 아몬드 쿠키. 이는 P가 몇 년 전 과학잡지에서 읽은 내용이므로 분명 사실일 것이다! 아무튼 미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우주란 아주 매력적인 곳임이 분명했다. 목성의 중력은 갓 튀겨낸 감자튀김을 더 바삭하게 하고, 소행성대의 기압은 샴페인의 거품을 더 풍부하게 보글보글 올라오게 한다.

깜깜한 방의 네 면이 우주를 향해 열리고 어느새 P는 토성의 고리에 1인용 테이블을 차리고 앉아 있다. 무릎 위로 냅킨을 펼치자 흰 천의 네 귀퉁이가 천천히 사방으로 떠오른다. P는 소매를 살짝 걷고 숨을 들이마쉰다. 우주의 고요 속으로 삼켜진 총성의 끝에서 피어오르는 화약의 냄새가 난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토치로 스테이크를 그슬이고 있다. 어디선가 분주하게 요리를 준비하는 소리와, 깊은 기름통에서 감자가 튀겨지는 지글지글한 소리가 들려왔다. 보글보글한 샴페인의 거품이 늘씬한 잔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허기진 뱃속에서 우르릉 지진이 한차례 재촉하듯 일었다. 갈증에 혀뿌리가 시어왔다. 큰 심호흡과 함께 P는 온 우주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알람이 울리자 아침이었다. P는 온데간데없었다. 몇 달 뒤 관리인이 지구대 직원들과 함께 빈 오피스텔 안을 둘러보았지만, 마스크 아래로는 작은 방 안을 연하게 맴도는 시큼달큼한 화약 냄새를 캐치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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