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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Jul 12. 2022

미노타우르스의 밤

꿈 연작


크레타 섬은 꿈꾸고 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연회의 시끌벅적한 열기는 새벽달이 지고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쯤 잦아들었다. 미노타우르스의 정수리 꼭대기로부터 100미터 위, 지상에서 들려오는 축제의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온다. 소년 시절의 미노타우르스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울다가 잠들기도 했다. 그는 사랑으로 인해 태어났으나 괴물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미로에 갇힌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 대답이 미로 끝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한동안 매일같이 탈진할 때까지 미로 속을 달렸다. 그러나 미로를 완주할 때마다 번번이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었다. 이제 그는 미로 속을 손바닥처럼 잘 알고 있다. 크레타 섬은 잠에 몸을 뒤척인다. 뒤척이는 크레타 섬에게 미노타우르스는 꿈을 선물한다. 그가 꿈을 선물한다는 사실을 섬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어두운 미로 속에서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밖에 없는 한낮의 햇빛, 점심 테이블의 격자무늬 식탁보, 오월의 따끔한 꿀벌의 촉감 같은 것들을 생생하게 자아내 꿈결에 실어 보낸다. 그렇기에 크레타인의 꿈은 세계의 다른 누구와도 비할 수 없게 아름답고 정교하고 생명으로 넘쳐흐르며, 그 테두리에는 항상 외눈박이 소 머리를 한 미노타우르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 그림자의 잔상은 또렷하지 않고 시신경을 비껴가는 맹점처럼 또는 손바닥으로 한쪽 눈을 가리고 보는 풍경처럼 한편으로만 잠시 보였다가 사라진다. 크레타인들은 자신들이 미노타우르스를 가두었다는 사실을, 태어나자마자 지하 미로에 갇힌 한 소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기 위해 매일 저녁 연회를 연다. 기억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술병을 따고 크게 노래를 부른다. 쿵쿵쿵쿵쿵, 그들의 마음속 지하 깊은 속에서 달리는 미노타우르스의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그러나 그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미로의 문이 열린다! 실끝을 따라 온 용사의 칼끝이 번득인다. 사랑으로 인해 그는 괴물로 태어났고 사랑으로 인해 그는 괴물로 죽는다. 크레타 섬은 이제 암흑만을 꿈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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