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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Aug 17. 2022

슬리퍼즈 엠파이어

꿈 연작

1. 조지프의 꿈


꿈에서 조지프는 172년 하고도 닷새 동안 도심 속을 걷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을 흐르는 하천의 교량들을 따라 걸었다. 교량의 동굴 같은 터널을 바라볼 때마다 그곳에는 아주 몸집이 큰 누군가가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같은 꿈에서 그는 감옥에 갔다. 아니, 갔다기보다는 곧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돈을 빼돌린 죄로 7주예요. 7주… 그는 7주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가, 그렇지만 그는 돈을 빼돌린 적이 없는데, 저지르지 않은 일로 7주 동안 감옥에 가도 되는 건가, 기왕이면 독방이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가 독방을 쓰게 되었는지 여러 명의 다른 죄수들 틈에서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는지는 모른다. 갈아입을 주황색 셔츠를 안겨 받고 잠에서 깨었기 때문이다.

눈을 뜨자 새벽 4시였다. 호텔 방 안은 추웠다. 창밖은 아직 깜깜했다. 조지프는 다시 잠에 들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습기로 눅눅해진 이불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주 멀리까지 달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부터 쓰레기 수거 트럭이 우르릉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지프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히고 잠든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꺼지지 않은 호텔 네온 간판의 글자들이 푸른 어스름을 배경으로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골목에는 리무진 한 대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시동을 켜고 정차해 있었다. 문득 조지프는 허기가 졌다. 그는 로비에 자판기가 있던 것을 기억하고, 음료라도 뽑아마실 생각으로 겉옷을 꺼내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장 문을 열자 난생 처음 보는 주황색 죄수복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다. 조지프는 말없이 주황색 셔츠를 잠시 바라보았다. 7주...... 결국 독방을 쓰게 되었구나, 하는 안도와 체념이 밀려왔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옷장 문을 닫았다. 침대맡의 시계를 건너다보았다. 새벽 네 시, 조식이 제공되기 시작하려면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았다. 그는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고, 이내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2. K의 꿈


모두가 잠든 새벽, K는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디제이 부스에 혼자 앉아 있었다. 비오는 날 유독 신청이 많은, 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 수록곡을 골라 틀고 크게 하품을 했다. 지독하게도 익숙하고 잔잔한 전주가 흘러나오자 K는 깜박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그는 영화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자리에는 중절모 쓴 남자가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푸른 담배 연기는 영사기가 쏘는 빛을 받아 허공에서 물결을 그렸다. 극장에서 흡연을, 하고 생각하다가 K는 문득 지금이 1980년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상하게도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다. K는 앞으로 몸을 숙여 남자에게 물었다. 이 담배는 향이 없네요? 중절모 쓴 남자는 대답한다. 네, 이 담배는 원래 냄새가 없어요.... 그렇구나, 하며 K는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문득 꿈 속이란 원래 냄새가 없는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교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다른 꿈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영화 속에서는 어두운 취조실에 짙은 인상의 경찰이 앉아 맞은편의 용의자를 협박하고 있었다. 밝은 스탠드 조명을 얼굴 가까이 가져가자 구불거리는 머리를 한 단정한 미인이 차갑게 화면을 쏘아보았다. 갑자기 환해진 화면에 눈이 시렸다. 처음 보는 배우들인데 연기가 대단하군. 저들은 나의 현실의 어느 곳에서 가져온 얼굴들일까, 하고 생각하는 사이 시계의 눈금이 새벽 네 시에 가까워졌다. 곧 정시를 알리는 자동 멘트에 이어서, 디제이의 멘트 없이 다음 노래가 흘러나올 것이다.


3. 말레나의 꿈


모두가 잠든 새벽, 말레나는 레스토랑 뒷편의 직원 휴게실에 앉아 졸고 있었다. 꿈 속에서도 그녀는 일하고 있는 중이다. 라디오에서는 하루에 수십 번은 틀어줄 것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감정이 고양된 후렴이 끝없이 반복되는 80년대 발라드였다. 선곡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법 했지만 디제이도 잠들어버린 것인지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말레나는 낮게 허밍을 하며 마감 손님들이 어지럽히고 떠난 테이블을 정리한다. 먹고 남은 음식을 익숙하게 한 접시에 몰아 정리하고 은식기들을 집어 담다가, 테이블 위에 상자 하나가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상자를 식기 카트에 함께 올리고 천천히 주방으로 밀고 들어갔다. 개수대에 접시들을 옮겨넣고 말레나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반짝이는 구두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흠 하나 없이 반짝이는 흰색 에나멜 재질에 바닥재의 마감은 금색으로 되어 있었다. 말레나는 상자 밑바닥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펼쳐 보았다. 쪽지에는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다. 말레나. 말레나는 유니폼과 앞치마를 카운터에 벗어두고 구두를 신어 보았다. 가게에서 맞춘 것처럼 꼭 맞았다. 이제 그녀는 음악에 맞춰 천천히 춤을 춘다. 오븐과 냉동고, 쓰레기 더미를 지나 바깥으로 몸을 옮기며. 멀리서 쓰레기 수거 트럭이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눅진 새벽 공기 속에서 어둠이 걷히고 있었고, 길 건너편에서는 호텔 리무진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말레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상아처럼 흰 차체 옆면에 적힌 금박 글자를 읽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SLEEPERS EMPIRE. 기사는 그녀에게 말없이 타라는 손짓을 했다. 말레나가 차에 타고 문을 닫자 리무진은 미끄러지듯이 출발했다. 새벽의 반대쪽으로 달리며 말레나는 새로운 밤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 밤새 택시가 정차해있던 골목길에는 기름이 샌 것처럼, 유독 깊은 꿈의 웅덩이가 빗물처럼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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