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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럭 Apr 23. 2022

영광


매일 스튜디오에 흙을 퍼 나르는 예술가가 있었다.

그는 도심 한복판, 교차로가 내려다보이는 12층짜리 건물에 아틀리에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는 몇 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건물 옆 공터에서 흙을 깊게 한 삽씩 퍼올려 아틀리에의 빈 바닥 한가운데 옮겨부었다. 재료가 쌓일수록 조각은 더 거대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 거대한 조각은 마침내 숭고의 영역에 이른다. (임마누엘 칸트는 숭고미를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구분지었다. 사면이 트인 벌판에서 찢어지듯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를 듣거나 파도치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표류하며 느끼는 공포스러운 경탄의 순간 - 크기와 형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한층 더 높이 끌어올려주는 힘이다. 숭고미를 다룬 칸트의 원문은 너무나 길고 장황해서, 그 위로 바쁘게 펜을 굴리던 후대의 학자와 번역가들은 그의 텍스트 자체에서도 거대한 파괴적 위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작품에 [영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광]은 일약 화제를 모았고 신문과 잡지에는 작품에 대한 평론이 앞다투어 실렸다. 지역 예술인 연합 월간지는 [영광] 대해 적으며 칸트의 원문을 길게 인용해 기재하며 경의를 표했지만 해당 인용구는 원고 길이 문제로 편집되었다. 확실한 것은 [영광] 앞에 선 사람들은 거대한 흙무더기 앞에서 하나같이 초월적인 감동을 느꼈다는 점이다. 한 평론가는 [영광]을 초여름 빛을 받는 에베레스트의 거대한 골짜기에, 다른 평론가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정적이 주는 무력감에 비유했다. 세간의 입소문을 타며 작품의 가치는 빠르게 치솟았고, 이윽고 [영광]이 설치미술 역사상 가장 비싼 값으로 거래될 것이라는 예측이 돌기에 이르렀다. 예술가의 에이전트는 몇 년만에 작품다운 작품을 팔 수 있게 되었다며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거대한 작품을 스튜디오 문 밖으로 옮겨나갈 방법이 없었다. 긴 고민 끝에 에이전트는 경매에 작품과 스튜디오를 한 묶음으로 내놓기로 결정을 내린다. 작품은 유서 깊은 경매 회사를 통해 수억 대의 가격에 낙찰되었다. 사상 최고라는 시장의 예측만은 못했지만 무명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으로는 유래 없이 높은 가격이었다. 반면 스튜디오 매매에 관해서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따랐다. 부동산업자와 도시건축위원회는 스튜디오의 가격을 매매가보다 깎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흙을 실어 나르기 위한 외벽을 설치해 건물이 위반건축물로 분류되게 된 점, 그리고 [영광]의 인기로 인해 건물 앞에 길게 늘어선 평론가와 예술가 무리로 발생하는 담배 연기와 소음을 생각하면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계산에 따라 상당한 시세를 자랑했던 도심의 스튜디오 건물은 기존에 비해 몇억 낮은 손해를 안은 가격으로 책정되었다. [영광]과 스튜디오를 판매한 손해와 이익을 상쇄하고 경매 수수료를 지불하니 옆 건물로 입주해 한 달어치 지불할 수 있는 월세만큼의 돈이 남았다.

그날 저녁, 낙찰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작품이 전시된 아래층에서는 잔끼리 부딪히고 샴페인이 넘쳐흘렀다. 저녁 식사에 이어 가나슈와 크림으로 만든 작은 [영광] 모형도 은색 트롤리를 타고 등장했다. 밤 열두 시가 되기 삼십 분 정도를 남겨두고, 경매 장면을 재현하는 세 번의 망치 소리와 함께 스튜디오는 흙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깊은 땅 속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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