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를 마시고 느낀 점
테라는 맛있다. 뒷맛이 깔끔해서 좋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지만, 수입맥주를 포함해 최근 마셔본 레귤러 맥주 가운데, 현시점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 같다. 다만, 꼭 캔보다는 병으로 마시는 걸 추천한다. 300cc 맥주잔에 두세 번 정도 나누어 따라 마시다 보면, 병목에 새겨진 독특한 회오리 문양에 눈길이 가곤 하는데, 느낌이 꽤 괜찮다. 테라를 즐겨 마시기 전까지, 마트에 가면 맥주는 거의 스텔라 아르투아나 기린 캔맥주를 집어 들고 왔는데, 최근엔 무조건 테라 병맥주를 집어 들게 된다.
테라는 올해 상반기에 하이트진로에서 나온 신제품이다. 테라에 관심이 생겨서 살펴보니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일단, 하이트진로라는 사명은 하이트맥주에서 진로를 인수합병하면서 하이트와 진로를 합해 나온 명칭인 건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하이트와 진로가 합병되기 전의 하이트, 그러니까 하이트맥주라는 사명이었다.
사실 하이트맥주라는 사명은 오비맥주에 밀려 만년 2위 신세였던 당시 '조선맥주주식회사'에서 90년대 초에 내놓은 신제품 하이트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40년 만에 오비맥주를 제치고 맥주 업계 1위에 올라서면서 탄생한 사명이었다. 결국 '하이트'라는 히트 상품이 맥주 업계 만년 2위였던 회사를 1위로 밀어 올리고, 기세를 몰아 회사 이름 자체를 '하이트'로 바꾼 모양새다.
어렴풋하지만, 당시 센세이셔널했던 하이트 맥주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당시, 두산 쪽에서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두산 계열의 오비맥주는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고, 물을 구매해서 마신다는 개념 자체가 없던 당시에, 하이트맥주가 지금의 생수 광고처럼, 암반 천연수를 컨셉으로 등장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암반 천연수라는 개념을 마케팅 컨셉으로 밀었던 것이 당시 이슈와 맞물리면서 대성공을 거두고, 품질에서도 호평을 받으면서, 하이트맥주는 처음으로 오비맥주를 누르고 맥주업계 1위를 탈환한다.
하이트가 오비맥주를 추월한 것은 업계에서 일대 사건이었던 것 같다. 당시 조선맥주는 회사 이름 자체를 아예 하이트맥주로 바꿔 버린다. 원래 하이트가 나오기 이전 조선맥주의 맥주 브랜드는 크라운맥주였다. 오비맥주에 밀린 2위 브랜드이긴 했지만, 꾸준하게 2위를 지키며 오비맥주와 시장을 나눠 가졌던 제품이었다. 하이트를 주력으로 밀었다는 건, 1위 상품이었던 오비맥주를 잡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자사 주력 상품인 크라운맥주를 희생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국 사운이 걸린 리스크를 감수하고 하이트를 밀었다는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하이트가 1위를 차지한 후, 오히려 하이트 맥주는 리스크를 피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2012년 오비맥주는 카스를 내세워 16년 만에 하이트맥주를 제치고 업계 1위를 다시 탈환한다. 사명까지 바꾼 하이트가 카스에 밀려난 모양새인데, 과연 16년 동안 하이트와 오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물론 여러 가지 일이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하이트맥주가 업계 1위가 되면서, 스스로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의 혁신을 주저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된다. 오비맥주의 경우, 수십 년 간 지켜 왔던 1위 자리를 하이트에게 내주면서 선택한 것이, 카스였다. 사실 카스는 오비맥주에서 만든 브랜드가 아니었다. 외환위기 시절, 진로가 어려워지면서 매물로 내놓은 자회사가 진로쿠어스였는데, 바로 진로쿠어스에서 만든 맥주 브랜드가 카스였다. 오비맥주는 카스의 진로쿠어스를 인수해서, 하이트의 대항마로 내세운다. 오비맥주로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새로 들여온 카스를 밀었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당시 카스의 광고는 꽤 신선한 느낌이 있었다. 하이트가 천연 암반수 마케팅으로 재미를 본 이후에 수질, 깨끗함에 집중하고 있을 때, 카스는 철저하게 20대를 타깃으로 젊고, 쿨한 이미지로 포지셔닝하는 광고를 내보냈다. 뭐랄까, 하이트가 나이 들고 식상해진 느낌이라면, 카스는 생동감 있고, 발랄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개인적으로 하이트와 카스의 느낌은 점점 그렇게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장에서도 카스의 점유율이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카스의 상승세와 하이트의 하락세가 오로지 마케팅 전략 때문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맥주의 경우 전통적으로, 도매상 영업이 점유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고 알려져 있는데, 하이트맥주의 경우 진로를 인수하고 하이트진로로 합병되면서, 오히려 영업력이 분산되는 역효과가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하이트맥주 역시 카스의 약진을 보면서 긴장감을 느꼈던 것 같다. 아직은 하이트가 맥주업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시절이었지만, 연이어 신제품을 내놓는다. 맥스, 드라이피니시d, 퀸즈에일, 필라이트 등 여러 제품군을 내놓는데, 카스가 시장 1위를 탈환하는 걸 막을 만큼 성공한 제품이 나오지는 못한다. 뭐랄까, 여전히 하이트를 놓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제까지 하이트에서 나오는 새로운 제품들은 사실상 하이트를 희생하고 밀어줄 만큼의 파급력은 없어 보였다. 결국 자사 상품 간의 경쟁과 잠식, 카니발리제이션을 용인할 만큼의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의미에서, 테라의 출시와 현재까지의 파급력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테라는 하이트가 2등이 확실해졌을 때 절치부심하며 준비하고 등장한 상품이다. 어찌 보면 테라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하이트라는 기존의 주력 상품을 포기할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존 병의 재사용이 불가능한 테라의 병 디자인만 봐도 그런 각오가 느껴진다고 하면 그건 너무 오버일까?
어쨌든, 모든 조직은 기존의 이익이 크면 클수록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존 조직에서 잘려 나가야 하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나가는 상품일수록 타사와의 경쟁보다 조직 내부의 눈치싸움이 더 치열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테라의 등장은 인상 깊은 부분이 있다. 뭐랄까?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이 떠오른다고 하면, 그건 또 너무 오버일까? 어쨌든 오늘도 깔끔하게, 테라 한 병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