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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를 꿈꾸기 전

by 녹음노동자

<어린 시절>

향수라고 하는 것,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라고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이다. 하지만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그리움도 없다. 내가 향수를 느끼는 곳은 경주에서도 남단에 위치한 외진 시골 외동읍 북토리에서 시작된다. 1990년대 초, 스마트 폰은 물론이고 휴대폰도 보급이 되지 않았던 때라 놀이라고 하는 것은 흙, 돌, 나무를 이용하는 것들이 많았다. 기억나는 놀이는 비석치기, 진돌, 땅따먹기, 얼음땡, 그림자밟기 같은 놀이가 있는데 하루 종일 재밌게 노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마을에는 5살에서 7살까지 비슷한 나이또래에 친구들이 많았다. 물론 그들 모두와 친했고 서로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놀이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쪽수가 맞지 않으면 우리는 깍두기로 다 같이 노는 문화가 있다. 누구를 따돌리거나 왕따를 시키는 행위는 약자들이 하는 비겁한 행동이다.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은 화장실도 없고 찬바람이나 큰 벌레들을 겨우 피하는 오래된 집이었다. 집의 입구에는 감나무 옆에는 포도나무를 심었고 소를 키우는 작은 축사가 집 옆에 붙어있었다.


<가족>

아빠는 소방관으로 일을 하셨는데 책임감이 강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퇴근을 하면 가끔 방에서 차렷, 열중 셔를 가르쳐 주셨다. 아빠를 올려다볼 때 천장이 얼마나 높았는지 모른다. 나중에 커서 집을 다시 보았을 때는 전혀 높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집이 작게 느껴졌다. 어릴 때는 말도 안들을 때라 밥상 앞에서 엄마랑 싸울 때가 많았다. 나는 토라져 침실로 들어가서 웅크리고 있으면 곧 아빠가 와서 나를 업어 다시 밥상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계속 밥을 먹었다. 사실 아빠는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투박한 경상도 남자였다. 그건 아마 할아버지에게 사랑의 표현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전쟁을 지나온 힘든 세대이다. 할머니도 언젠가 위안소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할아버지와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노력을 했다. 한 번은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사 와서 “이거 뭐야? 산타가 두고 갔나?” 서투른 연기를 하기도 했다. 나는 그 선물이 예쁜 포장지가 아니라 검정봉투에 담겨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당시 나는 산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냥 검은 봉투 안에 담긴 총을 들고 하루 종일 뛰어다녔을 뿐이다.

엄마는 정말 예쁜 사람이다. 아빠가 어떻게 엄마와 만나서 결혼을 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이견이 없어 보인다. 엄마는 책임감이 강한 아빠가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던 것 같다. 두 분의 연애사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이라 알 방법은 없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잠든 동안 쥐끈끈이에 붙어있는 쥐를 떼어 버리는 일에서 시작한다. 아빠가 출근하면 엄마와 같이 부침개를 부쳐 먹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엄마는 그림을 잘 그렸다. 나는 뛰어놀다가 요리를 하는 엄마 뒤에서 벽에 부딪치는 연기를 하면서 쿵! 뒤로 넘어간 적이 있는데 한참 뛰어놀아 피곤했는지는 몰라도 누운 김에 잠이나 자자는 생각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요리를 하는 엄마는 벽에 애가 부딪쳤는데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유치원에 들어갈 때 동내에는 게임기라는 것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게임기는 흙만 만지고 놀던 또래아이들의 놀이 문화를 바꾸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기록을 만들기 위해 손톱이 타서 까매질 때까지 조이스틱을 두들겼다. 이것도 요령이 생겨서 손가락에 휴지를 감싸서 게임을 했다. 게임에 빠진 아들을 보고 엄마는 서운함을 느꼈을까? 시원함을 느꼈을까?


<순진한 아이>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바로 전, 우리 가족은 살던 곳을 떠나 시내 가까이 이사를 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곳에 들어왔다. 형과 나는 거실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데 엄마는 “집이 좋으냐?” 물었다. “네” 대답은 했지만 친구들과 이별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 집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물만 내리면 되는 게 편리하기는 했을 것이다. 새로 이사한 곳은 전에 살던 곳에 비하면 꽤나 도시처럼 느껴졌다. 대형마트도 있고 건물들 사이가 빼곡했다. 이사를 한 이유는 아마도 우리 형제의 교육 혹은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이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엄마도 취직을 했다. 엄마는 아침이면 밥을 차리고 화장을 시작했다. 엄마의 화장은 우리 형제가 도시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만큼 어색한 일이었다. 도시에 들어왔지만 나는 여전히 순진한 아이였다. 몇 가지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하나는 학원원장선생님이 자신이 사회를 보는 동내 잔치에 HOT가 온다고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번 동내잔치에 HOT가 온다고 홍보를 해주었다. 당연히 잔치당일 HOT가 오지 않았다. 동내잔치 홍보를 위한 원장선생님의 거짓말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학원에 가는 날 원장선생님에게 가서 따졌다. “선생님 HOT 안 왔잖아요!!” “나도 메니져 통해서 소식을 들었는데 너무 바빠서 못 왔다”라고 다시 뻔뻔한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납득을 했다. "아 그렇구나... 하긴 HOT는 바쁘니까”나는 친구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번에 너무 바빠서 못 왔데” 친구들도 "그렇구나" 수긍을 했다. 그 당시 아이들이란 다 순진했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 동내에 있는 작은 산을 등산할 때 일어난 일이다. 등산을 할 때 벌레가 나타나 내가 움찔했는데 아빠는 “밟으면 죽는다” 대수롭지 않게 말을 했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 “밟으면 내가 죽는다”라고 오해를 했다. 나는 벌레를 피해 크게 돌아서 아빠를 따라 산을 올라갔다. “이래서 다들 산행을 위험하다고 하는구나” 조금 더 크고 나서야 그건 “내가 아니라 벌레가 죽는다.”라는 말이었구나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아빠는 왜 벌레를 밟아 죽이려고 했을까...

세 번째는 나는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배속에 엄청난 크기에 두꺼비가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변을 볼 때마다 발이라도 빠져나오면 어떡하지 너무 걱정이 되었다. 대충 두꺼비 다리의 크기는 내 종아리 만할 것이다 예상했다. 그리고 여자가 임신을 하는 것 단순히 많이 먹어서라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순진한 게 아니라 상식이 부족한 아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성적표 도둑>

학교를 다닐 때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서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암기하면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늦은 시간까지 학원을 보내었지만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나쁜 성적을 받아 올 때는 매를 맞기도 하고 모진 말들을 들어야 했다. 정신의학과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부모와 자식사이에 공부가 들어올 때 사이가 멀어진다고 한다. 나는 도무지 부모님이 예전만큼 편하지 않았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혼이 나지 않기 위해서 그뿐이었다. 나는 공부를 하는 일이 전혀 재미있지 않았고 계속해서 안 좋은 성적을 받았다. 성적이 나빠서 혼이 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결국 나는 성적표를 훔치기로 결심을 했다.

부모님이 퇴근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집으로 도착해서 성적표를 챙겨야 했다.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우체통을 열어보는 일을 반복했다. 다행히 성적표는 내 손에 먼저 들어왔다. 나는 훔친 성적표를 내 책상서랍 가장 깊은 곳 혹은 책장 뒤에 좁은 틈에 숨겨놓았다.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지킨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곧 친구들의 아들이 성적표를 받은 소식을 듣고 “다른 친구들은 성적표를 받았다는데 너는 왜 성적표가 안 날라 오냐?” 물어보았다. 나는 배송이 조금 늦나 보다 핑계를 대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뻔뻔한 성격도 못 되어서 불안감에 피가 말라갔다. 다행인 건 성적표를 숨기는 단순한 일도 잘 못 해서 어머니는 청소를 할 때마다 귀신같이 내 성적표를 찾아내었다. 그러면 부모님은 내 성적표를 열어보고 또 엄청 혼을 내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뭐가 달라질까 생각을 했지만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더 이상 대학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 1년 반을 다니고 대학공부를 포기했다. 지금 어른이 되고 그때를 돌아보면 학생들은 학교 성과주의에 희생자들이라 생각한다. 내가 느낀 학교는 학생 개개인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좋은 대학교를 줄 세우고 몇 명의 학생을 어느 명문대로 보냈는가 하는 "숫자"가 중요할 뿐이다. 사교육은 부모들에게 당장 자식들이 바보라도 될 것처럼 불안을 부추기고 잘못된 교육관을 만들어낸다. 나는 부모님이 어린 시절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던 약속을 잊어버린 걸까? 원망하기도 했다. 내가 대학을 그만두고 집으로 더 이상 성적표는 날아오지 않았다. 잠시 길을 잃었던 우리 가족은 자연스럽게 관계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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