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학생>
고등학교 시절, 거의 모든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교로 입학시키기 위한 교육열이 대단했다. 학교가 끝이 나면 학원버스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학생들을 태워서 학원으로 향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늦은 저녁이 되어있어고 이 일과를 매일 반복하는 것이 나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내가 느낀 학교와 교육은 개인의 목소리와 꿈을 허락해주지 않았고 억누르고 외면하는 방법만 알려주었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나는 가장 빛나는 시기에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게 “착한 학생”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비디오 가게>
90년대 초등학교 때에는 비디오대여점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형과 같이 비디오를 빌려 집에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테이프가 늘어지거나 문제가 있을 때는 집에 있는 비디오플레이어를 청소하거나 빌려온 비디오의 뚜껑을 열어서 먼지를 후! 후! 불어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토요명화 같은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요즘은 쉽게 휴대폰으로 다양한 영화를 열어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토요일에 TV에서 볼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추석명절에는 신문에 명절영화편성표를 확인하면서 성룡영화를 챙겨보았고 아주 가끔 영화관에 가는 일이 있었다. 인터넷이 흔하게 보급이 되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보는 경우가 많았다. TV에는 하루 종일 영화를 틀어주는 채널도 많이 생겼다. 우리가 영화를 소비하는 방법은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갔다. 비디오 산업은 점점 사양길로 들어갔고 우리 동내에 비디오 가게도 결국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 했다. 어느 날 비디오가게에는 비디오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면서 영업을 종료한다는 말이 붙어 있었다. 나는 매장 안으로 들어가 평소에 보고 싶었던 영화를 양손 가득 보물처럼 소중히 챙겼다. 즐겁게 쇼핑을 마쳤지만 비디오가게 사장님의 마음을 살피지는 못 했다. 아직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소중한 가치>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는 조금 특이한 도덕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도덕이야기만큼 영화 이야기를 많이 하는 분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도 도덕수업이 재미가 없어서 많은 시간 영화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영화는 너무 오래된 영화였다. 친구들은 쉬는 시간이 되면 매점으로 뛰어가면서 선생님이 한 영화이야기를 잊어버렸지만 나는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영화를 메모해 두었고 쉬는 날에는 선생님이 추천한 영화를 보는 일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지만 나는 천천히 영화에 빠지고 있었다. 하루는 도덕선생님이 <동방불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나는 평소처럼 쉬는 날 영화를 챙겨보았다. 동방불패는 무협영화이지만 사실은 러브스토리였다. 영호충이 마지막에 절벽으로 떨어지는 동방불패를 구하기 위해서 몸을 던질 때 나는 목 뒤로 전기가 찌릿하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영화를 볼 때 신기하게도 나는 종종 이런 느낌을 받았다. 영화는 현실과 다르게 너무 낭만적이었다. 영화가 끝이 나고. “ 나는 앞으로 영화라는 것을 내 모든 가치관 중에 가장 소중한 가치로 두자” 스스로 결심하였다. 이후로 나는 더욱 영화에 빠졌다.
<저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점점 영화에 빠지고 있었던 나는 쉬는 날 시간도 모자라서 다른 가족들이 잠자는 시간에도 영화를 보았다. 특히 홍콩영화에 큰 재미를 느꼈다. 아직도 <영웅본색>을 처음 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영화를 보는 동안 다른 가족들은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소리 없는 감탄을 하였다. 영화가 끝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엄마가 “너 잠 안 자고 뭐 해?!!” 소리를 지르고 들어와서 나는 급하게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일단 영화가 끝이 나고 엄마가 들어와서 참 다행이었다. 나는 잠자리에 누웠지만 머릿속에는 영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만약에 마크였다면 나는 마크처럼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오우삼 감독님은 어떻게 <영웅본색>과 같은 멋진 작품을 만들었을까?” 내 마음에 품은 영화라는 씨앗은 조금씩 더 커져갔고 나는 더 강하게 내면의 목소리를 억압해야 했다. 곧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나에게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 내가 가지고 노는 총을 양손으로 두 조각내는 모습을 보고 이후로는 한 번의 작은 반항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차곡차곡 아껴 둔 용기를 모아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취미생활은 대학졸업하고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 어렸지만 그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작은 반항은 너무 쉽게 끝이 나고 나는 성적에 맞추어 원하지 않는 지방대학에 토목공학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내면의 목소리를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어야 했다.
<군대로 도망가다.>
점점 더 상황은 최악이 되어갔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는 과에 관심 없는 수업을 듣는데 그냥 외계인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욱 내가 완벽하게 잘못된 곳에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나는 그런 것 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고 아무 소용도 없다고 판단하는 완전한 바보가 되어버렸다. 나의 삶에 나는 없고 단지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나 밖에 없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병들어 있었다. 그 사실마저도 꽁꽁 숨기고 심각성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 유일한 재미는 영화를 보는 것뿐이었다. 대학교의 중앙도서관에는 DVD 자료실이 있었고 정말 다양한 영화가 많이 있었다. 나는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있을 때는 DVD자료실에서 영화를 보았다. 학교를 다니고 있던 때 황당하게도 내가 “다독왕에 선정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소식이 황당한 게 나는 중앙도서관에서 단 1권의 책도 빌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DVD자료실에서 본 영화를 책 1권으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료실에서 2달 동안 100편이 넘는 영화를 보았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많이 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다독왕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오해를 하셨다.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영화만 보고 있다니 이런 불효도 없다. 대학교에도 시험은 많았다. 나는 대학교에서도 여전히 성적표를 숨기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더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든 빨리 도망가고 싶었다. 나는 자원입대를 해서 서둘러 군대로 도망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