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출근을 하면서 아침으로 김밥집에 앉아서 떡만둣국을 먹을 때였다. 티브이에는 친숙한 아침방송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프로그램에는 아이들이 나와서 트로트 노래 경쟁을 하였다. 먼저 아이들은 한 명씩 차례대로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한 아이가 자기소개를 하는데 “엄마를 위해 노래하는 ㅇㅇㅇ이라고 합니다.” 곧 뒤에 나오는 아이가 “엄마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노래하는 ㅇㅇㅇ입니다” 하고 소개를 했다. 이어서 카메라는 행복해하는 엄마의 얼굴을 이어서 비추었다. 나는 먹고 있는 떡만둣국이 얹힌 듯 속이 불편해졌다. 나는 속으로 “그럼 저 아이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노래가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부모는 아이를 삶의 연장선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개별적인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모는 먼저 살아봤다는 이유로 모든 답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옆에서 문제를 보면서 고민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서둘러 답을 일러주며 “이런 쉬운 문제도 몰라?”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혼을 낸다면, 아이는 그저 혼이 나지 않기 위해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하기에 급급하고 틀린 말을 하는 것을 겁내 할 것이다. 사실문제의 정답은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이가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과 해결이 아니라 스스로 상황을 극복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부모의 역할은 단지 아이가 어느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기다려주고 고민을 경청해주는 것일지 모른다. 때문에 잘못된 사교육들은 부모를 조급하게 불안하게 잘못된 교육관을 만들어 판단력을 떨어뜨리고 불행한 소비를 하게 만든다. 요즘 시대는 대학의 교육이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취미와 관심이 돈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단정 짓기 어렵다. 세상에서 오직 공부만 중요시하고 다른 일들을 가치 없다고 가르친다면,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상대방을 밟고, 경쟁에서 더욱 앞서기 위해서 고통받고 쓰러진 사람들을 못 본채 지나가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는 일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를 산다면, 서로가 서로를 염려하던 세상에서 벗어나 편협한 사고에 갇히고 인간성에 대한 공감대를 잊어버릴 것이다. 사람의 탐욕과 경쟁을 부추기고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는 우리들 자신이다.
아이는 부모의 생각에 순종하고 순응하는 삶에서 조심씩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만들어 가면서 기성세대인 부모님의 가치관과 충돌해야 할지 모른다. 부모와 자식은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르고 인생에 정답은 없다.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고 흔들리면서 결국에는 믿음과 확신을 가질 것이다. 결국 아이는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자립을 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넌 안 된다"라고 말할 것이다.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도 말이다. 나 이외의 사람이 의심하는 것은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은 충만해야 한다. 나 스스로 믿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믿어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이 가능할 리 없다. 부모의 보호를 벗어나 시작하는 걸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삶은 안전지대를 벗어나면서 시작이 된다. 느껴지는 불안감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모가 서툰 걸음마를 시작하는 모습을 답답해하며 화를 내고 아이의 몸에 줄을 더 단단히 묶어서 움직이려 든다면 아이는 스스로 일어서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진짜 바보가 되어버릴 것이다. 부모의 훈육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큰 영향력을 준다. 아이를 바보로 만들고 싶으면 비난하고 비교하고 화를 내면 된다.
역사상 상대방을 제압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폭력이다. 단순히 주먹으로 때리는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말들도 포함한다. 폭력은 단기간에 다른 사람을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 수 있다. 자식의 어질러진 방을 보고 "돼지우리냐? 보기 싫으니까 니 방정리 똑바로 해" 아이에게 말을 한다면 아이는 부모의 말에 억지로 방을 치우고 곧 부모는 깔끔해진 방을 확인할 수가 있다. 깨끗한 방은 아이가 주체가 되어서 한 일이 아니라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부모의 강요로 깨끗한 방을 만드는 일은 결국 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 것이다. 당장에 아이에게 혼을 내어서 깨끗한 아이의 방을 보고 편안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곧 아이의 방은 다시 어지러워질 것이다. 애초에 그 방은 아이의 방이지 부모의 방이 아니다. 결국에는 아이가 스스로 깨끗한 방의 장점을 알고 스스로 정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운동을 할 때 좋은 몸을 가지고 싶은 마음에 약물을 섭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약물의 도움을 받아 좋은 몸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좋은 몸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물은 몸과 정신을 해치는 절대 해서는 위험한 행동이다. 이는 운동이 단지 몸을 단련하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오는 것이다. 도박을 하는 사람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돈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옷을 잘 입기 위해서는 옷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안목을 바꾸어야 한다. 결국 바뀌어야 하는 것은 방이 아니라 사람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운동이란 그나마 정직한 것이다. 운동을 할수록 우리의 몸은 튼튼해진다. 글쓰기라고 하는 것 그나마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방청소도 결국에 우리의 뜻대로 되는 일중에 하나라는 것을 깨달으면 청소가 좋아질지 모른다. 방은 우리 무의식의 반영, 마음의 상태를 보여준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 운동, 먹는 것, 방청소를 할 수 없다면 다른 일에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결국 세상을 바꾸기 전에 방청소부터 하라는 말은 진실한 것이다.
우리는 교육열이 꽤나 치열한 나라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목표도 모르고 학교와 부모가 시키는 공부를 시작한다. 교육은 부모들에게 자식이 금방이라도 뒤쳐진 바보가 될 것처럼 불안을 부추기고 부모들에게 잘 못 된 교육관을 만들어낸다. 판단력을 잃은 부모는 교육과 사회에서 만들어놓은 시스템대로 성적과 순위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 오판하고 사교육에 빠져든다. “너 지금 공부 안 하면 저기 공사장에 아저씨들처럼 되는 거야” 부끄러움을 모르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좋아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여유도 없다. 그런 고민은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는 교육과 사회가 원하는 대로 자식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눈과 귀를 닫고 경쟁을 부추기고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뒤쳐진 아이들을 밟고 올라서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단지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이기는 것 경쟁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아이들은 아직 분명한 가치관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편협한 생각에 비판을 할 것도 없이 알려주는 가치관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인다. 순종적인 아이들을 보며 어느새 부모는 먼저 살아보았다 경험해 보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자아가 되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력감을 느낀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착한 아이를 연기하고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한다. 시간이 지나며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아이들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안착을 하지만 경쟁에서 이기지 못 한 아이들은 노력이 부족했다는 착각에 빠져서 스스로를 괴롭힐 것이다.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아이와 부모 사이에는 더 큰 괴리감이 생긴다. 자신의 자아로 살아본 적이 없는 아이는 올바른 가치관을 만들어 내지도 못 했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할 능력도 없다. 아이는 혼란스러움에 스스로 방문을 걸어 잠글 것이다. 방 만은 안전한 곳, 타인이 주는 괴로움을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일지도 모른다. 부모는 닫힌 문을 힘으로 열어보아도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순종하고 부모님 말에 반항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아이가 어딘가 고장 난 것 같다.” 며 정신병원 상담사에게 호소를 한다. 상담사는 아이가 받은 상처를 이야기해 주어도 "그럼 부모가 자식이 망하고 있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요!" 스스로에게 잘 못이 없음을 항변한다. "잘못된 것은 너야" 아이는 착한 아이라는 역할만이라도 칭찬받고자,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썼을 뿐이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머리를 달고 나오는데 모든 부분에서 의견의 일치를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가 다른 사람의 의견에 무조건 복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치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복종하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인형을 키우고자 한다면 아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얼마든지 아이들을 조종하고 복종시키면 된다. "순종하고 부모님에게 반항 한번 해본 적 없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다. 과일가게 사장님은 한쪽면이 멍든 사과를 보고 멍든 부분을 안쪽으로 감추고 반들반들하고 예쁜 면을 밖으로 보이게 만들어 놓는다. 이것을 건강한 사과라고 할 수 있을까? 멍이 든 부위는 점점 더 커지고 결국에는 모든 부위가 썩어서 버려질 것이다. 그럼 우리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 사기를 당하고 부당한 논리에 배신당한 사람들의 고통은 그들만의 것인가? 물밖에 있는 사람들이 물속에 빠진 사람들을 공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관심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몰락하기 때문이다. 상처는 결코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부모는 어린 시절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는 약속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회는 더 늦기 전에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의 역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