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칭찬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글을 쓰더라도 단지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대한 지적만 당할 뿐이었다. 글을 쓰면서 지적과 비난을 당하는 것으로 자연히 글쓰기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이 쌓이고 관심에서 멀어지는 일이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나는 이과와 문과 중에 선택을 해야 했다. 나는 당연히 문과에 재능과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이과에 들어갔지만 사실 나는 특히 역사를 좋아하고 문학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깨달았다. 단지 문학과 글의 존재는 문제를 풀고 1번부터 5번까지의 정답을 찾기 위한 일일 뿐 나는 이런 과정에서 글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 어려웠다. 정해진 시간 안에 빠르게 정답을 찾는 일 단지 사람의 지능을 가를 지는 몰라도 문학을 제대로 음미하는 일을 아닐 것이다. 이런 교육과정에서 정말 문학의 재미를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성인들의 독서율이 낮은 것은 이런 잘못된 교육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고득점의 학생들이 추앙받게 하고 다른 학생들을 들러리를 서게 만드는 경쟁사회의 피해자들은 우리 자신들이다. 공존과 균형에서 멀어져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뒤처진 사람들을 패배자로 낙인 짓는 교육을 좋은 교육과정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수능에서 언어등급 6등급이 다시는 연필을 잡지 말라는 결정타를 날린 것은 사실이다.
나는 20대 후반이 되어서 조금씩 일기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다 내가 평생 상관도 없을 것 같은 글을 쓰는 인간이 될 수가 있었을까. 이 과정도 절대 쉽지는 않았다. 나는 영화를 찍는 일에 매력을 느끼고 22살 군대를 전역하고 영화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영화를 찍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시나리오이다. 나는 시나리오에 대해서 배운 적도 없고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 글쓰기에 대한 조언이라고 "그냥 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이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인지는 알 수가 있지만 글쓰기를 하는데 "그냥 쓰라"는 말은 조금 무책임하게 들리기도 한다. 한 번은 단편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처음 글을 썼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시나리오를 들고 배우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여배우를 만나는데 여배우는 내 시나리오를 보면서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시나리오를 이렇게 쓰면 안 됩니다" 단지 나는 영화를 찍고 싶다는 허영심에 차 있었지. 좋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고민은 부족했다. 배우의 말은 참 감사한 말이었다. 시나리오에는 작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런 지식들이 전무했고 사실 단편시나리오의 내용 자체도 형편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서 작가님들이 가르쳐주는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기도 글쓰기와 관련된 책과 시나리오 작법책들을 꽤나 열심히 읽었다. 재능이 있는 친구라면 이미 길을 가고 있겠지만 나는 부지런히 공부를 하면서도 좀처럼 글을 쓰는 일이 익숙해지지 못했다. 나에게 단지 글을 쓰는 일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옮기기 위한 용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굉장히 편협한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끄럽지만 솔직하게도 글을 쓰는 일은 세상 지루하고 쓸모없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마치 운동을 안 하는 사람이 운동을 하면서 수명을 늘릴 바에야 운동을 하는 시간을 더 살겠다고 하는 말과 같았다. 이건 굉장히 무지한 말인데 운동을 하는 사람 그 가치를 계속 누리며 사는 것이다. 나는 글쓰기를 지루하게 생각하고 도파민이 빵빵 터지는 게임을 좋아했다. 게임보다 재미있는 일을 찾지 못한 것은 나 스스로 불행한 일이다. 인간은 왜 어떤 것을 창작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게 되는 걸까?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글을 쓰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글을 쓰는데 무엇이 힘들었느냐 한다면 아주 근본적인데 무엇을 쓸지를 몰랐다. 더 근본적으로 글을 쓰는데 주제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몰랐다. 무엇을 써야 할지 혹은 무엇이 글감이 될 수 있을지 전혀 몰랐다. 주제가 정해지지 않으면 굉장히 장황한 글쓰기가 될 것이다. 글쓰기는 인생의 목표처럼 정확해야 하고 그 목표로 노력이 모여야 하는 일이다. "주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글을 쓰려는 나는 그냥 쓰라는 말을 적극 받아들여 초등학교 일기에 하던 바보 같은 짓을 반복했다. "오늘 무엇 무엇을 했다. 참 재밌었다" 그냥 쓰라는 조언을 한 사람도 나 같은 사람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그 말은 적어도 기본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책상이 문제인가 바보 같이 새로운 책상을 구매하기도 했다.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작은 눈덩이를 뭉쳐서 굴려야 하는데 나는 작은 눈덩이조차 없는 인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는 "나의 시나리오는 걸으면서 완성이 되었다" 말한 적이 있다. 단지 그것을 종이로 옮겨 시나리오로 만들었을 뿐이다. 걷는 일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부지런히 걸었다. 글을 쓰고 뭐를 하고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걷는 것은 할 수 있었다. 그럼 걷는 노력이라도 하자.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걸었다. 사실은 하면서도 이게 정말 도움이 되는 걸까 하는 의심이 대부분이었다. 한 번은 산책을 하는 중 멀리서 시작장애인분이 케인을 짚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분을 지나고 나니 그 뒤에서 시각장애인을 지켜보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실례가 되는 행동 같아 얼굴을 유심 볼 수는 없었지만 지나치며 잠깐 그 표정을 보았는데 복잡한 심경의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내 인상에 깊게 새겨져 다시 멀어져 가는 시각장애인분을 돌아보는데 앞으로 가며 케인을 들지 않은 손을 위로 높이 들고 흔들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에게 "나 괜찮아"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 보였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을 안심시켰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책상에 앉았다. 주제는 이것으로 해보자. 그렇게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산책을 하면서 일어난 사건과 경험에 상상력을 붙였다. 자연스럽게 궁금증들이 생겼다. "저들은 무슨 관계였을까?" "시각장애인분은 어디로 가고 있던 것일까?" 어떠한 주제를 이야기하듯 그곳에 글을 쓰는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이 묻어나게 되어있다. 그 주제나 나뭇잎이나 커피에 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생각이 타인과 같을 수는 없다. 재미없는 작가는 있어도 재미없는 주제는 없다는 말이 진실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걸으면서 글쓰기 이것은 나에게 참 도움이 되는 일이고 많은 작가들이 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 단순히 자리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르리거나 연필을 잡아서 종이에 쓰는 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소 우리는 의식에 지배를 당하고 살아간다. 만약 "내가 손으로 만지는 것들이 다 금이 된다면"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보통사람들은 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야 하며 생각을 치워버릴 것이다. 다만 글을 쓴다는 것은 모든 무의식의 해방이다. 안된다고 하는 것들의 정신적인 해방인 것이다. 무의식으로 쓰고 의식으로 다듬는 것이다. 무의식은 자유로운 상상력이고 다이아몬드의 원석이고 아이디어의 씨앗이다. 자유롭게 무의식으로 꿈꾸고 의식과 이론의 칼로 다듬어지고 점점 형식적인 모양을 갖춘다. 처음에는 의식과 무의식 어떠한 말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런 말들이 친숙하다. 아이디어라는 씨앗 내 토양 안에서 생각과 관심을 먹고 자란다. 요리사 고든 램지의 말처럼 훌륭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맛있는 요리를 먹어보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다만 먹는 일에 너무 빠져서 요리를 만드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나 스스로 끊임없이 연습해야 하고 매일매일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아이디어의 씨앗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어야 한다. 무의식에 빠지는 일은 마치 운전을 하면서 잡생각에 빠지는 일 같은 것이다. 운전을 자연스럽게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자유롭게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걷는다는 것 마찬가지로 무의식과 가까워지는 일이다. 그냥 걸어도 좋고 어떤 생각을 가볍게 열어두고 걸음을 해도 좋다. 단 너무 그것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면 다시 의식의 칼을 들이밀게 되고 시야는 좁아지게 된다. 아이디어란 잠과 같아서 그것을 잡으려고 하면은 금방 달아나 버리기도 하고 마냥 오기만을 기다려서도 안되고 누워서 잠을 청하는 노력은 해야 하는 오묘한 것이다. 영화감독 데이빗 린치 "빨간방" 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원제목은 "catching the big fish"인데 fish는 아이디어를 은유한다. 데이빗 린치감독은 아이디어를 낚기 위해서 초월명상을 이용한다고 한다. 나는 초월명상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걷는 일로 명상과 같이 무의식으로 다가가는데 도움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헬스를 좋아하는데 헬스에 빠지는 일도 무의식으로 들어가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운동을 한다는 것 나에게는 글을 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서 필요한 것은 메모장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휴대폰을 이용한다.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해둔다. 요즘은 말을 하면 글로 옮겨주는 기능이 참 편하다. 나는 걸으면서 휴대폰을 입에 대고 말을 하면서 메모를 하기도 하는데. 지나갈 때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쳐다보는데 다들 걸어가면서 휴대폰에 코를 박고 가는데 특별히 내가 하는 행동이 무엇이 이상한지는 잘 모르겠다. 더 솔직히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이상해 보이는 것 중요한 일이 아니다. 메모를 해 둔 것은 따로 내 글창고에 다시 잘 저장해 둔다. 단지 끄적이는 글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씨앗처럼 잘 보관해 두어야 한다. 의식적인 칼 이론적인 공부는 그것에 얽매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것이니 게을리하면 안 된다. 오랜 기간 동안 글쓰기에 재능이 인간만이 글을 쓸 수 있다고 오판을 했다. 그것은 글쓰기를 경외시 생각하는 행동은 나를 더 글쓰기와 멀어지게 했다. 이는 좋은 행동이 아닌 것 같다. "재능이 없다면 이 길을 가려하지 않는다. 재능이 없다면 이 책을 펴보지 않았을 것이다." -로버트 맥기- "재능이란 단지 그 일에 흥미를 일으키는 것뿐이다." -밥로스- 로버트 맥기와 밥로스 아저씨의 말은 많은 위로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조금은 경직되고 남의 시선과 생각을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경우가 있다. 어떠한 일에 대한 생각을 물을 때는 보통 "모르겠다" 혹은 "아무거나"와 같은 말을 자주 한다. 자신의 느낌에 솔직해지는 것, 다른 사람의 생각하는 것을 떠나서 나 스스로 생각하는 것 느낌을 가지는 일이 중요하다. 잘 써야 하는 가? 그러고 싶지는 않다. 게임을 오래 하면 잘하는 소위 고인 물이 된다. 다만 이전처럼 재미있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잘 몰라도 창의력을 가지고 이것저것 시도할 때가 가장 재미있을 때이다. 글쓰기 내가 하는 일에 두근거리는 일 설레는 일 나는 글을 쓰는 시간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린다면 그런 시간들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완벽주의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연필이 나아가기를 힘들게 할 뿐이다. 요즘은 어느 때보다 영상이 넘쳐나는 시기이고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원하지도 않는 영상에 정신과 집중력을 소모하는 시기이다.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글을 읽는 것보다 수동적으로 영상을 받아들이는 일을 편하게 느낀다. 다만 글을 쓰는 이유는 오직 글만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데 집중력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란 종이 앞에 앉으면 글을 생각하게 되었있고 게임기 앞에 앉으면 게임을 하게 되어있다. 계속해서 연습하고 노력을 해 볼 뿐이다. 요즘 시대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을 지식을 보여주는 일에 열심히다. 나는 헬스를 좋아한다. 감사하게도 전문가들이 운동에 대한 지식을 많이 공유해 준다. 다만 우리는 영상을 보는 일로 몸을 좋아지게 만들 수는 없다. 글 쓰는 방법 누구에게나 같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운동은 다만 운동을 하면서 좋아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글쓰기 또한 글쓰기를 하면서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