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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신론자가 죄인인가

by 녹음노동자

내가 사는 동내 이사를 왔다. 너무 깔끔하고 예쁜 동내이고 지날수록 마음에 들었다. 특히 석양이 질 때가 아주 멋진 곳이다. 하지만 오래 지내면서 점점 동내의 이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하철 역 주변으로 번화가가 형성이 되어있는데 그곳에는 항상 종교인들이 가득하다. 특히 어떤 중년의 아저씨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회계하라" 라디오 구간 반복처럼 그늘을 차지하고 같은 말만 계속하고 있다.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눈에 흉한 것은 고개를 돌리면 되지만 귀에 들리는 것은 귀를 막아도 들어온다. 정말 악의적인 방법이다 가끔은 마이크에 스피커를 틀어두고 저주스럽고 폭력적인 말을 들어야 하니 괴로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기분 나쁘고 저주스러운 말을 듣고서라도 한편으로 걱정스러워 병원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질 뿐이다. 들어서 기분이 나쁘면 피해서 가는 방법밖에 없다. 바로 집으로 갈 수 있는 횡단보도를 두고 지하의 길을 지나서 반대편으로 올라가면 "좋은 말씀"을 드린다는 전단지를 나누어주고 있는 아줌마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지나가는 일이 매우 피곤하게 느껴진다. 이런 일들을 불편감을 느낀 사람이 나뿐만 아닐 것이다. 이런 방법이 효과적이지 않은지 종교 단체들은 컴퓨터 무료 교육이나 혹은 타로점을 무료로 봐준다는 방법으로 교묘하게 방법을 바꾸어서 전도를 진행한다. 결국 방법이 없어 상가도 사람도 없는 길로 더 돌아 집으로 향하는 일을 선택한다. 집으로 가는 길 구청 옆으로는 길게 나무들이 늘어서 있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참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곳인데 마치 아름다운 계곡을 불법점유하는 상인들처럼 종교인들이 책상을 여러 개 피고 점거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접근해서 누구 하나 걸려라는 식으로 믿음을 판매한다. 동내에서 하는 다양한 행사에도 종교와 연결이 되어있을까 관심을 끄는 일을 선택한다. 저들이 파는 믿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들은 단지 그들의 신념과 믿음이 옳다고 여기고 타인에게 퍼뜨리고 싶은 마음뿐이지, 애초에 타인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인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방법이 잘못되었는데, 장기적으로 그들이 건강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절대 불가능 한 일이다. 그럼에도 석양은 여전히 아름다운지 우리 동내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다들 카메라를 들고 예쁜 석양의 사진을 찍어보려 애쓰는 모습이 쉽게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 도시가 다르게 보인다. 특히 종교인들이 많은 일요일에는 아예의 외출 자체를 잘하지 않는다.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범죄자와 형사는 서로를 금방 알아본다고 한다. 천적은 서로를 알아본다. 이 도시에 살다 보니 신기하게도 대충 종교인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멀리서 입맛을 다셔하는 것이 보인다. 멀리서 말을 붙일 것 같으면 나는 크게 그들을 둘러가거나 뒤로 도망가는 일을 선택한다. 그들의 행동은 단지 무자비한 채식주의자 같다. 그들은 고깃집에 쳐들어가서는 동물학대 끔찍한 일을 멈추라고 말하는 사람들 같다. 그들의 신념에 옳다고 믿으면서 타인의 믿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신론자들은 종교시설에 가서 "종교는 거짓이다"라고 말하거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나라는 자유 대한민국이고 다양한 믿음들이 존중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육식주의자들이 채식주의자 비건 식당에 가서 행패를 부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애초에 그들은 그런 행위들을 시간낭비라고 느낄 것이다. 거리를 지나며 관심도 없는 "좋은 말씀"을 거절하는 것만 해도 사실 스트레스가 받는 일이다. 이런 행위들은 나 스스로 타인을 의심하고 경계하게 만든다. 한 번은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다. 나는 평소와 같이 종교인으로 생각하고 먼저 거리를 두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종교인이 아니었고 그저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제야 경계를 풀고 목적지를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알려드린 적이 있다. 또 한 번은 이런 경우도 있다. 어딘가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나는 부르고 있었다. 말을 바로 하지 못하셔서 나는 전혀 할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잠시 그냥 지나쳐서 갈까 고민했지만 다가가 다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역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셨지만 대충 앞에 도로와 인도로 넘어가는 20센티가 조금 넘은 작은 턱을 넘지 못해서 도와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드리고 인도로 올라오는 것을 도와드렸다. 할아버지는 다시 웅얼거리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나는 할아버지와 헤어지고 사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 스스로는 왜 이런 냉소적인 인간이 되었을까. 무엇이 이웃을 의심하고 멀어지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종교인이 하는 행동 중에 나 스스로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미성년자에 대한 포교이다. 종교인들은 포교의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아직 판단력이 무르익지도 않은 미성년자들에게 접근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일에 연관되는 일을 싫어한다. 그러면서는 나는 왜 나서서 그런 일들을 말리지 못했을까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겨우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보이는 친구가 종교인들이 입는 유니폼을 챙겨 입은 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심경을 느낄 수 있다. 가끔은 종교단체가 있는 건물 앞에서 종교에 빠진 딸을 둔 엄마가 "내 딸을 돌려달라"는 현수막을 걸고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건 결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나치의 학살로부터 생존한 유태인들은 사태를 관망을 하는 것으로도 공범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비겁하게 무시하고 지나가는 일을 택한다. 미성년자에게 접근하는 일 단지 종교라는 이유로 포교가 용인되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조금도 특별함이나 성스러움을 느낄 수 없는데 말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이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에 불과한 것이다. 단지 사람들에게 불안을 부추기고 판단력을 흐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종교인들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스스로 회계를 하고 천국이라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하니 참 속이 터질 노릇이다. 이것은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인가. "예수천국 불신지옥" 과거 법정스님의 말씀중에 이런 글이 있다 "믿지 않는다고 하여 자신의 자식이라고 하는 인간들을 지옥불에 던져버리는 당신네들의 신들을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들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을 구제하겠다" 나는 재미있는 생각을 좋아하니 만약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상상을 해보면 그 모든 종교인들이 천국에 모여서 떠들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니 정말 가고 싶은 곳은 지옥이다. 혹시라도 나는 천국으로 갈 염려를 할 것이고 염라대왕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지옥으로 보내달라고 청할 것이다. 혹시 지옥으로 가서 먼저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고 있는 법정스님을 만난다면 반가움에 달려가 부둥켜안고 싶은 심정이다. 지옥의 비명소리는 다정하게 들릴 것 같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있다.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천주교 다양한 종교들 모두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무신론자들에게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천주교 똑같은 종교일 뿐 아무 차이가 없다. 폭력성과 강압성의 정도 차이에 있는 것이지 다 똑같은 종교이다. 무신론자들은 그들을 굉장히 존중하려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는 배려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내가 이만큼 배려하면 상대도 이만큼 하겠지 하지만 호구가 되는 게 현실이다. 이만큼 했는데도 가만히 있네? 생각할 것이다. 다들 소수의 사이비의 일로 치부하고 다수의 종교들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무신론자들 왜 스스로의 믿음을 존중받지 못하는 벌을 받아야 되는가 얼마나 착해 빠져서 이런 걸 버티고 있는 건가. 다시 나는 물어보고 싶다. "회계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무신론자는 죄인이 아니다. 난 거리를 지나며 종교인들이 우리가 도대체 무슨 피해를 주는 거냐?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듣는다. 자신들이 주는 고통에 대해서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내 짧은 글은 절대 특정 종교를 비판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단지 무신론자의 믿음이 존중받을 수 있기를, 조용히 예쁜 거리를 거닐 수 있기를, 서로 간 의심보다 존중을 하는 세상이 오기를 소망할 뿐이다. 다행히 사람들이 이런 공감을 많이 하면서 포교를 하는 일을 규제하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오는 시간 동안 나는 잠시 더 종교인들을 피해 다니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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