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조금 부족한 아이가 살고 있었다. 언젠가 아이는 아버지와 산에 등산을 하러 간 적이 있다. 아이는 아빠를 따라 산을 올라가는 길에 알록달록하게 생긴 벌레를 보고 주춤했다. 아버지는 주춤하는 아이를 보고 말했다. "밟으면 죽는다" 아이는 그 말을 밟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말로 오해를 했다. "이래서 다들 산행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아이는 벌레를 크게 둘러서 계속 산을 오른 기억이 있다. 또 아이는 자신의 배 속에 황소개구리가 자라고 있다는 황당한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아이가 먹는 음식들을 빼돌려 먹으면서 아주 크게 자라 있을 거라 대략 50센티 정도 예상을 했다. 행여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숨겨놓은 황소개구리의 발이 힘을 주면서 같이 "퓽!!" 튀어나오면 오떡하지 걱정을 했다. 다행히 황소개구리는 화장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부족한 아이는 심성만큼은 착해서 길에서 술에 취한 할아버지를 집으로 데려다 드리면서 전교생들 앞에서 표창장을 받은 기억이 있다. 아마... 학교생활 중 유일한 상장이었으리라. 맞다 이건 내 이야기다. 지금의 기억으로 한 학년에는 6반 정도가 있는데 한 반에는 40명의 학생들이 책상을 앞 뒤로 바싹 붙이고 앉아야 했다. 그러니 학생들 앞에서 이름이 불려 나가는 표창장을 받는 일은 꽤나 긴장이 되는 일이었다. 다만 지금 같은 학교에는 한 학년에 1반이 있는데 그 학생수도 20명 안팎이라고 하니 참 귀하고 귀한 아이들이다.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시간은 정말 지옥과도 같았다. 학교란 부모님들이 하나같이 자식들을 성공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경쟁만큼은 매우 치열한 곳이기도 했다.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부와 명예를 의미하는 것일 뿐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성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오직 돈과 명예를 가지는 직업만이 추앙을 받고 이외의 직업을 폄하하게 되는 아주 불행한 생각을 공유하게 된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간을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면서 내 인생에 많은 것들을 버리를 쓸모없는 시간으로 기억한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빛나는 시간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겠는가. 학교에게 있어 학생은 그저 성과에 불과했다. 새벽에서부터 자정까지 자리에 앉혀 공부를 시키니 사람이라 생각했으면 그렇게는 못 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문제지의 정답을 찾으면서 높은 점수를 받게 하는 교육이지 각자의 재능을 가진 학생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일과는 무관한 교육이다. 나는 이런 생활이 너무 숨이 막혔다. 매해 학교 정문에는 몇 명의 학생을 어느 대학교로 보냈는지에 대한 숫자와 성과가 붙어 있었다. 학교는 자신들을 대단한 학교로 보이기 위한 성과를 위해 얼마든지 학생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독재자들이 권력을 위해 병사들을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듯이 말이다. 무조건 순종하고 고분고분 머리를 조아리는 아이에게는 착한 아이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나쁜 아이들이 절대 기득권에 도전하는 일이 없도록 길들이다. 학교 생활은 너무 끔찍해서 가끔은 어떤 사고로 잠시 몸이 다치면 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너 정말 괜찮은 거니?" 물어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생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교육은 부모에게 불안을 부추기고 학생들에게는 경쟁을 부추긴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도 되는 일이라 정당성을 부여한다. 더 많은 부를 쌓기 타인에게 끼치는 피해는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는 사회를 살고 있다면 결국에 그 피해자들은 우리 자신 아니겠는가. 어린 학생들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여유도 없이 시키는 대로 공부에 몰두할 뿐이다. 공부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은 우위를 점하고 경쟁에서 밀린 학생들은 스스로 쓸모없는 인간이라 오판하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뒤에서 들러리를 설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공존과 균형의 두 가지 가치를 모두 잃어버렸다. 단 한순간도 공존과 균형을 이야기하는 교육자를 본 적이 없다. 기계처럼 공부한 아이들 때로는 정말 기계처럼 망가지기도 한다. 오직 타인에 의해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타인의 삶을 살아간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방 안으로 숨는 일을 선택한다. 방 안만큼의 누구의 공격도 없는 안전한 곳이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유례가 없는 성장을 하면서도 정신적인 성장만큼은 이루지 못하고 급격한 몰락을 경험하고 있다. 사회와 국가는 다만 출산을 부추기며 새로운 생명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듯하다. 멈추어 있다고 죽은 것이 아니다 비슷한 문제점을 가진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들이 폭탄으로 돌아와 사회의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닥쳐올 위기들을 고개 돌려 애써 외면해 보지만 고개를 돌린다고 없는 일이 되지 않는다. 실패는 한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쌓이는 것이다. 2025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최악의 경제 상황과 더 이상 미래 세대를 낳지 않는 둥지가 되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망가진 아이 중에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일상적인 생활이라는 것을 하지 못 했다. 나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줄을 몰랐다. 겨우 자리에 앉아서 있으면 점원분이 와서 나에서 무엇을 먹을 것이냐 물어보아야 목소리를 떨면서 음식의 이름만 겨우 이야기했다. 지금도 나를 이상하게 내려보던 점원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30살이 가까워질 때까지 옷을 사서 입은 적이 없다. 옷을 살 때는 단지 내가 무슨 옷을 좋아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이상하지 않은 옷을 구매했다.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옷, 단지 유명한 브랜드가 유명한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광고판처럼 다니는 일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채색의 옷을 입는 것이 특징적이다 튀어 보이는 사람 별난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보수적인 사회에서 어떤 창의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개인의 능력이란 개성을 보존할 때 그 능력을 최대로 발휘한다. 사회는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꼭두각시가 필요한 것이지 자기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옷을 자기 스스로 찾아서 입을 줄 안다는 것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옷이라는 것 타인이 보았을 때 아무리 이상하게 입어도 사실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입을 옷을 스스로 찾아서 입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문제점은 나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관계를 맺는 방법을 전혀 하지 못했다. 교육이란 학생들을 단지 문제지를 풀고 높은 점수를 받게 만드는 것으로 경쟁시키는 것뿐이다. 이런 교육이 지능의 우위를 가릴지는 모르지만 공부에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바보로 만들어내는 멍청한 일이라 확신한다. 나는 그 수준이 매우 심각한 수준인데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내 약점들을 들키는 것을 꺼려했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멀쩡한 사람처럼 행동했지만 완벽하게 망가진 인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 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일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군대에 들어가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을 시작했다. 모든 시끄러운 소리로부터 떨어지고 조용한 곳에서 머물러 있을 때야 비로소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내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속삭임이었다. 나는 20살이 넘어서 겨우 정신적인 걸음마를 시작했다. 나는 군대에서 만큼은 어느 때보다 나 자신에게 묻고 답하는 일들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겁이 나는 일이기도 했다. 단 한 번도 내 의지대로 움직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내 앞에 펼쳐진 모든 노선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했다. "나는 영화일을 할 것이다" 그것은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약을 삼키는 행위이다. 이 선택은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말하는 선언이었다. 나는 군대를 전역하고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부족한 아이는 사회에서 홀로 서는 일을 시작했다. 원래 삶이란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면서 시작하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바보가 독립을 했다. 안에서 새는 놈은 밖에서도 샌다. 독립을 한다라는 것 쉽게 생각했다. 아니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못 했다. 모든 일을 알았으면 독립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은 몸을 던지는 행위가 현명할 때가 있다. 독립을 하고 먼저 생소했던 문제는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고지서가 날아오는데 이게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나는 몇 달을 연채 하기도 했다. 이것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단지 무지해서 생긴 일이다. 세금신고라는 것도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경제지식은 상품을 구매할 때 세금이 붙는다는 것 혹은 돈을 벌 때 3.3 프로는 내가 세금으로 내는 것이구나 단순히 나는 세금을 잘 내고 있는 인간이라 생각했을 뿐 세금신고를 해야 하는 일이나 왜 3.3프로를 때는 것인지, 그 돈을 누가 가져가는 건지, 환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런 무식한 인간이 사회에서 어떤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이용당하기 바쁘니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다. 배를 곪지 않기 위해서 저금통을 깨기도 하고 편의점 사장님이 주는 유통기한이 지난 김밥을 받아먹기도 했다. 다만 나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 누군가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는 영화를 찍고 나서 실업급여를 받을 자격이 되었지만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왜냐? 단순히 그것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이런 제도를 이용하고 악용하는 사례들도 많다고 하던데 다들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바쁜 사회에서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서 나는 사회에서 돌아가는 많은 복지 시스템에 대해서 알 수가 있었다. 단 주민센터에서는 신청주의라는 말을 썼다. 신청주의 라는것 "손을 뻗지 않는 이상은 도와주지 못한다."라는 말이다. 공무원들은 그런 환경도 인력도 되지 않으니 아쉬운 사람이 먼저 복지제도에 대해서 공부하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학교를 다닐 때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식들을 공부했으면 어땟을까. 국민연금, 건강보험, 세금과 관련된 내용은 학교 교육에서 잘 습득하지 못했다. 조금만 이런 일들에 대해서 일찍 알았다면 눈물 나는 고생들은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아쉬워해 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라에서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나처럼 고생하는 바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