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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추석의 풍경

by 녹음노동자

어린 시절 대략 초등학교를 저학년 때 추석이라고 하면 그 전날부터 어머니는 항상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로 바빴다. 엄마는 부지런히 기름에 부친 전들을 창가에 가지런히 정렬을 하였다. 그럼 나는 티브이를 보고 놀다가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전을 주워 먹는 일들을 했다. 전들이 그만큼 없어지는데 엄마가 모를 리가 있을까 엄마는 그냥 전을 더 많이 부칠뿐이다. 그리고 추석 전날로 해서 대구에서 큰아버지의 가족들이 내려와서 하룻밤을 자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사촌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 좋았지만 엄마는 또 저녁에 가족들이 밥을 먹을 큰 상을 봐야 하고 잠을 잘 곳까지 마련해야 하니 피곤한 일이기는 하다. 엄마는 추석당일에도 가족들 중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할머니 할아버지 집으로 가져갈 음식들을 챙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를 애먹이지 않기 위해서 일어나 옷을 갈아 있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집은 버스로 단지 몇 정거장 떨어진 당시에도 오래된 주공아파트였고 평수도 아주 작았다. 아침에 일찍 도착하면 엄마는 또 바쁘게 전을 굽는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재롱이나 떨고 있으면 그 좁은 아파트로 친척들이 하나 둘 도착한다. 재롱이라고 해봤자 할아버지가 쳐보라고 손바닥을 샌드백처럼 내밀면 그곳에 말랑말랑한 주먹을 내지르는 정도이다. 도착한 친척들은 1년에 설과 추석 2번 볼 수 있는 얼마나 반가운 얼굴들인가 자연스럽게 웃음이 난다. 곧 대구에서 도착한 큰어머니와 사촌누나 엄마의 일을 거든다. 큰아버지는 한문으로 지방을 쓰고 밥풀로 병풍에다가 붙였다. 큰아버지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유를 나를 참 좋아해 주셨지만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어딘가 마음에 골이 깊고 친하지는 못 했다. 좁은 거실에는 큰 상을 하나 겨우 펴는데 그곳으로 제사를 지낼 음식들이 풍성하게 올라가기 시작한다.


상이 차려지고 제사를 지낼 준비를 마치면 가족들은 하나 둘 상 앞으로 모인다. 모인 가족들은 10명이 훌쩍 넘는데 절을 하기 위해 서면 나는 거실에서 벗어나서 겨우 절을 했다. 몇 번이고 어른들이 절을 할 때 그저 따라 하고 조용히만 있으면 길지 않은 과정은 끝이 난다. 그러면 다들 상을 피고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애매한 식사를 하는데 풍성하게 차려진 전과 탕국만 있으면 밥이 꿀떡꿀떡 넘어가는 맛있는 식사가 된다. 다양하게 만들어진 음식들을 먹고 있으면 추석이 얼마나 풍요로운 느낌을 주는지 모른다. 식사를 마친 나와 사촌들은 티브이 앞에 둘러앉으면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금방 송편과 간식들이 내어준다. "너희들 지금 먹는 거 쉬는 거 아니지?" 당시에는 휴대폰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아서 신문을 통해 영화 편성표를 확인했다. 어른들은 가요무대 같은 프로를 좋아했고 트로트 가수인 설운도, 현철, 태진아, 송대관 씨의 인기가 참 좋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하나뿐인 티브이를 양보해 주시면 서커스나 마술쇼 같은 프로도 인기가 있었지만 단연 성룡영화야 말로 빠질 수 없는 일이다. 인기가 얼마나 좋은지 성룡 영화를 보고 그다음 성룡영화를 보기도 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영화관에 가는 일은 드물고 특별한 날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성룡은 어떻게 영화를 이렇게 재밌게 만들 수가 있을까. 당시에 두께가 60센티도 넘어 보이는 티브이 앞으로 모인 풍경을 요즘 친구들은 믿을 수 있을까. 지금은 휴대폰으로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영화들이 넘쳐나지만 둘러보다가 영화를 틀기도 전에 지쳐버리는 풍요 속의 빈곤을 겪고 있으니 무슨 일인가 싶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자리가 불편한 가족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족들도 그들만의 사연이 있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어른들의 일을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친척어른 분들이 떠날 때 내 손에 용돈 몇 천 원이라도 쥐어주시면 나는 고스란히 엄마에게 용돈을 전달했다. 엄마는 "돈 욕심 없는 놈" 핀잔을 주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내가 돈 쓸데가 어딧겠어요?" 말이 나온다. 모든 입는 것 먹는 것 아무런 부담과 걱정 없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특권이다. 엄마는 또 집으로 향하는 친척들에게 전과 간식들을 푸짐하게 나누어 준다. 조상님이란 가족들이 모일 수 있게 설과 추석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우리 집은 마지막으로 정리를 마치고 저녁이 다 될 때쯤에 집으로 돌아간다.


엄마도 피와 뼈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고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에 빠진다. 엄마의 노곤함을 알기에 최대한 조용히 놀고 있으면 엄마는 어느새 다시 일어나 저녁을 차리니 엄마라고 하는 존재는 초인이라고 부를만하다. 2001년 미국에 9.11 테러가 일어나고 수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한다. 그날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공교롭게도 할아버지는 그날 세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추석에는 점점 적은 친척들이 모이고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따라가시면서 그나마 모이던 가족들도 이젠 모이지 않는다. 이젠 아버지, 어머니, 형 가족들이 모여서 밥을 먹는 일이 추석에 하는 일이다. 시간이란 영원하지가 않고 늘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게 변화한다. 친척들도 여느 인간관계처럼 자주 만나야 하는 것 만나는 일이 없으면 그만큼 마음도 멀어진다. 다만 우리 같은 추억을 가지고 있으니 어디서도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야 한다. 지금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그 상위에 차려진 음식 당연한 것이 없다. 요즘은 사과와 배 몇 개를 담아놓은 과일 선물세트가 10만 원을 넘기도 하니 물가를 생각하면 손이 가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을 잘한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챔피언이다. 가끔은 오늘부터 시간이 거꾸로 가서 다시 어머니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성인이 되면 무언가를 책임지게 되고 불안과 걱정을 안 고사는 일은 너무 당연한 일이 된다. 다시는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어린 시절의 것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은 엄마에게 또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겠다. 엄마가 결혼을 시작할 때 우리 가족은 경주에 아주 외동읍 북토리라는 정말 외진 곳에 살았다. 나는 어릴 때라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엄마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무모한" "열악한"이라는 말을 쓴다. 당시에는 화장실도 없었고 아침에 일어나 엄마는 쥐 끈끈이에 붙은 쥐를 떼어내는 일부터 시작했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열악함에서 풍요로움 다시 열악함이라고 하는 청룡열차를 타고 있다. 지금도 입에 넣을 것이 있으면 감사함을 생각해 본다. 추석이 오는 날이면 여름이 끝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럴 때면 나는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계절의 냄새를 깊게 맡아본다. 바람은 옛 기억들을 같이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더 이상 다음 세대는 이런 명절의 풍경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글로 전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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