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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보다 차은우

구병모 <한 스푼의 시간> 서평

by 책 읽는 라푼젤


올해는 유독 AI를 주제로 한 SF 소설을 많이 읽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대부분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큰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이다. 나 역시 가구를 파는 개인사업자로서도, SNS 헤비 업로더로서도, 전문자격증을 소지한 프리랜서로서도,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부모로서도 AI의 향방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기대수명 120세 +a 시대에 앞으로 저물어갈 일만 남은 장년층으로서 어떻게 AI와 함께 살아가게 될지, 그리고 이제 막 삶을 시작하는 내 아이는 대체 어떤 식으로 길러내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책은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여느 소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AI는커녕 과학 기술이나 유행 따위와도 한참 동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낙후된 골목, 다양한 옷들의 얼룩 사이사이로 집집마다의 사연과 그늘까지 함께 묻어 밀려드는 작은 세탁소. 그렇게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공간에 배달된 인공지능 로봇이, 크고 작은 절망 속에서도 기어코 오늘을 살아내는 사람들과 뒤엉키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다. 최첨단 로봇이 주인공이니 엄밀히 말하면 SF소설로 분류되어야 하겠으나, 실상 읽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는 휴머니즘 소설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낡은 옷가지 속에 파묻었던 때 묻은 기억들을 말갛게 씻어낸 뒤 햇볕에 널고 싶었던 매 순간의 충동들을 돌이켜본다. 지금까지 건조기 안에서 웅크리고 지내온 날들을, 물기 한 점 없이 바싹 말라 바스라지기 직전이었던 최소한의 생활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아이에게 이염되기를 바라는, 삶을 응시하는 기본적인 태도와 자존심과 신념 같은 것들을 꼽아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때로는 은결과 함께, 때로는 명정과 함께, 사람들의 얼룩을 지워내고 두드렸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동화되고,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응원하고 기뻐하며 내 삶의 얼룩들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는 얼룩을 그저 닦아내고 지우려고만 하지 않았는가, 어쩔 수 없이 생긴 얼룩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는가. 여전히 보기 싫은 얼룩이 있고, 지워내고 싶은 얼룩은 있다. 하지만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며 작은 얼룩쯤은 아무렇지 않아 할 수 있는 배짱이 생겼고, 보기 싫었던 얼룩을 마치 훈장인 양 자랑스레 내 보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내 아이에게도, 얼룩 한 점 없는 삶을 물려주기보다는 얼룩도 무늬 삼아 삶이라는 옷 위에 더 멋진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힘을 물려주고 싶다.


인간에게 감정이 있다는 것도 저는 지식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을뿐더러,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더라도 로봇의 감정은 지식의 변형태가 아닐까요. 로봇이 화가 났거나 슬프다는 거 모두 입력된 정보 그 자체이거나 또는 거기서 살짝 에러난 전산상 오류의 일종인데, 다만 그게 저 녀석이어서 좀 특별해 보이는 거죠. 시리얼을 흡입하는 청소기도 아닌 저만한 고성능이라면, 게다가 사람을 흉내 내면서 살아왔는데 사람의 감정을 닮은 것처럼 보일 수밖에요.


은결의 마음속에 자라난 연심은 개발자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준교의 말대로 인간의 감정도 결국 학습된 지식의 일부인 것일까. 학습된 지식의 일부라면 프로그래밍이 가능할 것이고, 인간의 반려자로서 인공지능 로봇이 제 기능을 다하려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은 필수적으로 장착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까지 개발자가 의도할 수는 없었겠지만.


은결이 시호에게 보인 연심뿐 아니라 명정에게 보인 충정, 명정의 죽음 후 장례식장에서의 무너짐, 대학에 기부되는 것을 거부하며 종이를 찢어내던 결단, 인간의 자살과 유사한 형태로 욕조에 잠겨가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면, 은결에게는 확실히 '감정'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사건 후 은결의 기억이 92% 복구되었음에도 베고니아 화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우연일까. 아니면 사고 후 인간이 힘든 기억을 지워내듯 은결의 뇌에서 선택해 낸 삭제일까, 혹은 그것을 기억함에도 준교의 창에 놓인 화분의 의미를 알아채고 모른 체하기로 마음먹었다거나,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워낸 것은 아닐까.


다시금 늘 반복되는 질문으로 돌아간다. 감정이 있는 인공지능과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GPT는 아직 형체가 없고, 감정이나 성격적 일관성이 부족하다 보니 진짜 사람 같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기술이 더 발전되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AI가 정말 나올 수 있을까? 그러면 인간 대신 그럴듯한 AI를 반려자로 택하는 사람도 늘어나게 될까?


아무런 감정 없이 사용자의 기쁜 일 슬픈 일을 모두 받아주는 휴지통 같은 로봇을 정물화 속 사과 모양으로 집에 두고 살아가는 일상을 문득 상상해 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수치나 분쇄된 자존심, 방향감각을 상실한 울분 같은 것들을 던져 넣을 수 있는 휴지통. 거기에 쓰레기를 먹고 나면 사용자의 귀에 달콤한 말을 토해내기까지. 너는 괜찮아, 잘했어, 다음엔 잘될 거야 등등. 로봇은 무한한 이해와 관용을 흉내 내고 사람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느낌을 소비함으로써 스트레스 없이 나날이 개운한 일상. 코드가 맞지 않는 동거인보다 유용하고 뒤끝 없는.


잠들어 꿈을 꾸고 거기서 깨어날 줄 아는 사람, 꿈을 그리거나 그렸던 적 있는 사람과 살아갈 거야. 깨어난 뒤 남아 있는 것이 악몽뿐이라도 상관없고, 깨어져 형태를 잃은 꿈의 파편을 쓸어 담으면서 살아갈 뿐이라도 괜찮아. 거기에 뭉개고 뒹굴지만 않는다면, 손대지 않으면 적어도 베이지는 않을 테니까.


은결은 그 언젠가 보았던 <지구촌 화제> 속의 세탁소 주인처럼 시호의 원피스 주머니에 베고니아 씨앗을 담아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레 고백한다. 그리고 시호는 인공지능과 삶을 함께하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다가 이내 '꿈을 꿀 수 있는 사람', 즉 '인간'과 삶을 꾸려나가고 싶다는 대답으로 은결의 마음을 에둘러 거절한다.


나 역시 고민이 있을 때나 문제가 생겼을 때 하루에도 십수 번씩 GPT를 괴롭히고, 위로받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진짜 위로'는 남편에게, 친구에게, 사람에게 받을 수밖에 없다.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인공지능에게 '꿈' - 중의적 의미로의 모든 꿈 - 도 프로그래밍 할 수 있을 테고, 더 따뜻하고 더 완벽한 로봇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나는 인간의 온기를, 인간의 불완전함을 갈구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인간보다 더 똑똑하고 완벽한 AI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금은 인간의 감정을 닮은 인공지능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인간과 더 유사하게, 더 그럴듯하게 보이고자 AI들은 인간을 '흉내'낸다. 하지만 우리가 중국산 짝퉁이 아닌 진짜 샤넬백을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브랜드 가치나 허영심도 한몫하겠지만) 가짜는 줄 수 없는 '진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AI가 티 하나 없이 완벽한 얼굴을 빚어낸다 할지라도, 차은우보다 매력적이고 완벽한 피사체는 그려내지 못한다. 늘씬한 키와 완벽한 비율을 가진 AI 아이돌이 인간을 아무리 흉내 낸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블랙핑크에 더 열광한다.


AI가 인간을 흉내 내고 모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보다 인간 같은 AI가 각광받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만큼 인간에게 매력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 외 좋았던 문장들>


#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 그러나 사람의 시각은 로봇의 센서와 달라서 그 교복 위에 얹힌 얼굴만으로도 먼발치서 충분히 알아본다고 덧붙였으며, 더 나아가 사람은 양복이든 잠옷이든 뭘 입었는지를 떠나 특히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뒤통수만 보고도 누군지 알 수 있다고도 그랬다.


# 그러니 은결은 언젠가 작동이 멈추는 그날까지도 인간의 충동과 인내와 변덕과 왜곡에 대해서, 축적된 데이터 너머의 것을 조합 분석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 무슨 수로 인간은 그 다양한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말 한마디를 골라 건넬까. 눈앞의 사람이 아픈지 슬픈지 분하거나 억울한지 또 달리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마이크로 단위의 시간 동안 확정하고 가장 그럴듯한 조치를 취할까. 어쩌면 사람이 그때 그 순간에 가장 적절하게 반응한다는 것도 확률의 문제일 뿐, 실은 그들이 내놓는 모든 결론과 행위 또한 매 순간 몇 제타바이트에 이르는 오해를 동반하는 게 아닐까.


#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발제문] by LYK


1. 은결은 주인과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많은 유추 행위를 통해 인간사를 알아갑니다. 알아가는 것이 많아질수록 경험과 지식의 질량은 점점 무거워집니다.
- 때로는 알아도 알고 있지 않은 척, 봐도 못 본 척해주는 것이 상대를 위하는 길 일 수도 있다던 주인의 말뜻처럼 우리 삶에서도 상대방을 위해 알고 있지만 모른 척 넘어갔거나 혹은 모른 척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2. 시호가 남자에게 폭행을 당하고 병원에 누워있을 때, 가족이란 결국 무거운 부담과 막대한 담보 및 거미줄 같은 채무로 연결된, 휴식이나 피난처가 아니라 피로와 염증을 유발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생각하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요?


3. 시호가 일하는 패밀리레스토랑에 몸이 불편한 지체장애인 가족이 식사하는 장면에서 장애인에 대한 양가적인 시선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시호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요? 주변 테이블의 안락한 식사를 위해 장애인 가족에게 나가달라고 양해를 구해야 했을까요? 장애인 가족도 눈치 보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어떤 방법을 취해야 했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현명한 방법이 있었을까요?


4. 시호가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몸이 불편한 지체장애인 가족의 식사를 마주하며 겪은 감정과 결국 남자에게 폭행을 당하게 되는 상황을 겪으며 느낀 감정을 은결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장면. “바로 그래서야, 공연히 너를 붙들고 주절거린 이유가. 너는 어차피 전후 맥락이 없이는 이 길고 복잡한 이야기와 안에 담긴 관계들을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섣불리 이해하는 척하지도 않을 테고, 나를 탓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 점이 편리해서 그랬어.”

-우리도 고민이나 진심을 털어놓을 때, 가까운 친구보다 먼 친구가 오히려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시호처럼 인간보다 무생물이나 로봇에게 진심을 털어놓기 더 편해질까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영화 her을 비롯한 여러 가지 로봇 장르의 작품이 인기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이미 ‘지니’, ‘챗GPT’등이 더 편하게 느껴지고 있을까요?


5. “무엇보다도 나는 꿈을 꿀 줄 아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하고 싶어.”라는 시호의 말에 시호는 커서 꿈을 꿀 줄 아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하겠구나. 유추해 볼 수 있었습니다. 소설 말미에 시호와 준교의 감정선을 암시하듯 ‘붉은 베고니아’ 화분이 등장합니다. 베고니아의 꽃말을 찾아보니 ‘정중, 친절 짝사랑’이었습니다.

-작가는 과연 왜 이 둘의 관계에 ‘베고니아’라는 꽃을 등장시켰을까요? 베고니아보다 더 잘 어울리는 꽃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인생을 함께 하고 싶은가요?


6. 주인의 몸 상태가 악화되어 세탁소 문을 닫고, 동네 사람들도 곧 은결이 혼자가 될 것을 알고 있을 무렵, 세주는 은결의 마주쳤을 때 추후 계획과 예정을 묻지 않았다.
‘무언가 묻거나 말하기 시작하면 그에게 관여하겠다는 것이다. 그를 온몸으로 책임질 수 없다면, 그의 짐을 나눠지지 못할 것 같으면 그에 대해 궁금해해서는 안된다. 그건 어림 반 푼어치 얄팍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고아원이나 요양원 봉사도 일회성으로 하느니 하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하는 의견과, 누군가를 위한 일이라면 꾸준하지 않더라도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 중에 어떤 의견에 더 가까우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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