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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서평

by 책 읽는 라푼젤


번드르르한 말처럼 사악한 마약은 없어. 촌구석 술집년을 베네치아 공주처럼 느끼게 만들지. 그리고 나중에 진실의 순간이 오면, 즉 현실로 되돌아오면, 말이란 부도 수표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 네 미소가 나비보다 더 높이 난다는 말보다 술주정꾼이 주점에서 네 엉덩짝을 치근덕거리는 게 천만번 낫지.


촌구석 술집년을 베네치아 공주로 만드는, 평범한 시골 우편배달부를 구름 위에 살게 만드는 '시'의 힘. 이 책은 그 자체로 한 편의 거대한 시이자 시 예찬서다. 아름다운 문장들과 유려한 메타포 위를 구르듯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마음속에서 시 한 편이 꿈틀거린다. 나도 멋진 문장 하나쯤은 피어내봐야겠다 싶은데, 밖으로 꺼내보기엔 멋쩍고, 혀가 굳어버려 입을 떼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 슬쩍 이슬라 네그라의 바닷가로 마음을 흘려보내본다. 그곳에 가면 달라질까. 번잡한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그곳에서라면,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을 흔들어 어지럽히는 고민과 불안과 값싼 욕구들로부터 멀어진다면, 나도 멋진 시 한 편 뱉어볼 수 있을까.


제 미소가 얼굴에 나비처럼 번진대요.
제 웃음이 한 떨기 장미고 영글어 터진 창이고 부서지는 물이래요. 홀연 일어나는 은빛 파도라고도 그랬고요.


어느덧 결혼 8주년을 지난 헌신부(?)다 보니 풋풋한 연애 감정은 전생의 일이 된 지 오래다. 그래도 소싯적 부지런히 연애깨나 했던 나. 장미와 통닭 중 십중팔구 통닭을 골라내는 유물론자이지만, 이 나이 먹고 보니 값비싼 가방과 구두 따위의 선물이 줬던 환희보다 꾹꾹 눌러 담은 편지 속 어설픈 고백이나 마음을 거꾸로 뒤집어놨던 문장들이 국 가슴에 더 오래 남았다. 설익은 문장 속 진심은 반복도 모방도 되감기도 어렵다.


마리오가 해 준 말은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았어요. 저는 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할 때도 그 생각을 할 거예요.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떠올리면 순식간에 나를 그 시절 그 마음으로 데려가주는 문장도, 그렇게나 눈부신 시절이 있었나 싶어 수줍어지는 문장도, 조금은 낯 뜨거워 얼굴이 화끈거리는 문장들도 있다. 가끔 남편이 너무 미울 때면, 남편이 결혼식 전날 내 인스타 게시물에 남겨준 댓글을 떠올려보곤 한다. "You are my today and all of my tomorrows." 아주 나중에야 (마리오가 네루다의 문장을 베껴 고백한 것처럼) 남편이 어느 영화에서 베껴온 문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문장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다. 남편이 연애 시절 내게 선물했던 첫 샤넬백은 이제 낡고 너덜거리지만, 남편이 주었던 문장의 기억은 해가 갈수록 더 진하고 선명해지기만 한다.


선생님은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사랑의 감정이 실려 오고 갔던 모든 말들과 마음이 '시'가 아니었을까. 화려하고 쫀득한 메타포는 없을지라도 너도 나도 모두가 시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비단 연인에 대한 사랑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품었던 모든 뜨거움이 한 구절 시였던 시절. 어쩌면 그 시절이 지금 일지로 모르고.





"이 녹음기를 가지고 이슬라 네그라를 거닐면서 마주치는 모든 소리를 녹음해 줘. 우리 집 유령이라도 필요해. 건강이 좋지 않다네. 바다가 아쉬워. 새들도 아쉽고. 우리 집 소리를 실어 보내 주게. 정원에 들어가서 종을 울리게. 먼저 바람에 울리는 작은 종들의 가냘픈 소리를 녹음하게. 그리고 다음엔 큰 종 줄을 대여섯 번 잡아당기라고. 종, 나의 종! 바닷가 종루에 걸려 있는 종만큼 낭랑하게 들리는 말은 없지. 그다음에는 바위 가로 가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담아 줘. 갈매기 소리가 들리면 녹음해 주고. 밤하늘의 침묵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까지도."


시간 관계상 서평에 담지는 못했지만, 이 부분이 참 좋았다. 내가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면, 혹은 더 늙게 된다면, 나는 어떤 소리를 그리워할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부모님의 목소리가 너무 그리워 영상을 많이 남겨두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는 어느 게시글 속 댓글이 떠올라 한차례 눈물을 쏟았다. 채 자라지도 않은 아이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벌써 그립기도 하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흘려버리거나 외면했던 소리들이.


[발제문] by MBK

1. 마리오는 “선생님은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라고 물어볼 만큼, 시를 어려워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를 알게 된 뒤부터 마리오는 ‘말’을 하게 되며, 사랑을 고백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이 소설 속에서, 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시’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예: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위로가 되어주는 존재, 사랑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 혹은 삶을 조금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것 등)


2. “시인이 아니라서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걸요.”
마리오는 말주변이 없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도 걸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를 빌려 말하기 시작하면서 사랑도, 분노도, 꿈도 표현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시인이 아니라서’ 말하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혹은 ‘남의 말(노래, 책 등)’을 빌려 내 마음을 대신 표현했던 경험이 있을까요? 있다면 함께 공유해 보아요.


3. 베아트리스의 엄마는 “말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야.”라고 말하며 말의 허무함을 이야기합니다. 반면 마리오는 “글이란 음미해야 하는 거예요. 입 안에서 스르르 녹게 해야죠.” 라며 말이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여러분은 ‘말’은 결국 남지 않고 사라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사람 안에 남아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올해(또는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말(문장)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주세요.


4. 마리오는 시를 배우고 말을 하기 시작하지만, 그 시작에는 늘 네루다가 그의 말을 들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끝까지 완벽한 답을 주기보다는, 마리오의 말을 기다리고, 웃고, 반응해 주는 순간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이 소설에서 사람을 변화시킨 것은 ‘말을 잘하는 능력’이었을까요? 아니면 ‘누군가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태도’였을까요? 그리고 올해를 돌아봤을 때, 나는 더 많이 말한 사람이었나요? 아니면 더 많이 들어준 사람이었나요?


5.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은 혁명, 정치, 죽음이라는 무거운 배경을 지니고 있지만, 시인과 우편배달부, 친구와 연인, 이웃으로 이어지는 관계들처럼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이야기합니다.

이 책을 덮은 뒤, 여러분은 올해를 돌아보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을까요? 그리고 내년을 맞이하며 붙잡고 가고 싶은 단어 하나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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