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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Apr 12. 2020

삶이 소설이라면

하루키의 <직업으로의 소설가>로 부터

하루키는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박학다식한 걸로 유명하다. 달리기를 하거나, 위스키 여행을 하고 이러한 체험과 지식들을 엮어낸 에세이들도 인기가 많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하루키는 이 시대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 중 한명일 것이다.


책을 읽기 전 하루키에 관해 많이 들었던 내용은 '하루키는 아침 일찍 일어나 몇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반드시 그날의 분량을 써낸다'는 것이다. 예술가나 창작가는 갑자기 떠오른 영감에 일필휘지 하듯 한 번에 결과물을 만들어버린다거나 술이나 약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재능을 발휘한다는 예상과는 다르다. 다른 창작물과 소설은 장기전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쉽게 통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재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꾸준함인데, 그 이야기가 <작가로서의 소설가>에 배어 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하루키의 습관에 대해 알 수 있었고, 그가 소설을 대하는 자세에서 삶의 자세를 돌아볼 수 있었다.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선, 오히려 마이너스해야 한다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작가들은 자신만의 문체나 화법을 가진다. 이 오리지널리티가 분명한 작가라면, 책의 표지를 가리고 글을 읽어도 누가 썼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의 이 오리지널리티를 인간에게 적용해본다면 수많은 사람들 중 나만이 가진 것 - 즉, 나는 무엇인가인 것 같다.


작년부터 '행복'이라는 것에 사로잡혀있었다. '나는 어떠한 특별함에 반응하여 행복한가'가 머릿속에 집요한 물음표가 되어 괴롭혔다. 답을 찾기 위해 많은 활동과 경험을 했다. 많은 시도와 경험을 하다 보면 나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음표는 가려질 뿐 사라지지 않았다. 

덜어내 보는 시도를 하고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기 위해서 밖을 서성이지 않고, 나의 가장 안쪽 깊숙한 곳만 남도록 중심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보면 정말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추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 같다.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것이 본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상관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싶다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그것이 본질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덜어내는 것'이 '더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하거나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잠시 불안감을 접어둬야 할 것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다 보면 흐름을 찾게 된다.

하루키는 소설의 전개에 대해 "나중에 뒤돌아보고 '아, 결국 그런 흐름이었구나'라고 깨달은 것이지 처음부터 정확히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산다는 것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엄청난 계획을 원하는 대로 실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저 꾸준히 하다 보면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꽤 멋진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내가 쓰는 소설에 오리지낼리티라는 게 있다면 그건 '자유로움'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소설을 쓰고 싶다'고 지극히 단순하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불현듯 생각이 나서 처음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가 갑자기 소설을 쓰게 된 이유도 자연스러움에 대한 가치관 때문이 아닐까. 무언가를 시작하는데 엄청난 계획과 비장한 각오가 아니라도 자연스럽게 하다 보면 흐름을 찾고, 좋은 결말로 이어질 것 같다.


그저 힘을 빼고 꾸준히 하면 다 잘 될 거다.




삶이 소설이라면,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은 힘이 들어간 문장들로 가득할 것이다. 장르는 투쟁일지 또는 노동 일지다. 수면이 부족한 주인공은 최대 생산량을 달성하기 위해 매일같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애석하게도 그 안에 어떠한 로맨스도 없다. 이 채찍질의 끝은 어느 결말로 향해가는 걸까.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조금은 어깨에 힘을 빼고 오히려 마이너스를 해보아야겠다.


삶을 소설이라고 비유하니, 소설을 조금 더 재미있게 전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대부분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아니지만, 삶이라는 소설에 있어서는 노련한 있는 작가들이다. 하루키의 책에서 배운 대로 힘을 빼면 각자의 소설이 흐름을 타고 꽤 멋진 결말로 나아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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