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

by 퐝지

헤르만 헤세, 내면의 이야기

헤르멘 헤세는 이 책을 자신의 이름이 아닌, 책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출판했다. 그렇기에 그가 자아성찰을 하며 느꼈던 것들을 싱클레어라는 인물을 빗대어 표현한 것 같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헤르만 헤세 내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책 속 '데미안'은 현실적인 인물로 느껴지지 않는다. 고작 주인공인 싱클레어보다 한 살이 많을 뿐인데,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종교와 삶에 대해서 말이다.

이를 통해 싱클레어에게 방향을 제시해준다. 강하게 그의 생각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싱클레어가 조금씩 그가 생각하는 진리에 가까워지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싱클레어가 다시 그를 찾을 때, 그는 이러한 글귀를 보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프락사스

아프락사스는 이렇게 묘사된다.

온전한 세계를 숭배해야 하므로 하느님이면서 악마이기도 한 신을 모시든가, 하느님과 악마에게 동시에 예배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 하느님이면서 악마이기도 한 신이 바로 아브락사스였다.

어릴 적부터 신실한 부모님과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밝은 세계와, 살인과 강도 그리고 배신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어두운 세계. 두 곳에서 혼란을 느끼던 싱클레어는 아프락사스에 깊이 공감한다.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에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산책을 하다가 그와 내면을 공유할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그들은 자주 만나며 서로 의견과 논쟁을 나누지만, 균열이 생기고 만다.

싱클레어는 진리를 믿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이를 전파하고 싶으면서도 과거의 신학과 자료를 끊임없이 검토하는 그에게 일침을 날린다. 이에 그가 대답한다.

"당신이 옳아요." 그는 잠시 기다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관해 옳을 수 있는 한에서 말이오."

옳다는 말이, 저토록 길어지는 데에 정말 군더더기 없이 옳게 느껴졌다. 뜬금없지만 이 대목에서 감명을 받았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관해 옳을 수 있는 한에서, 옳다.

깊이와 겸손이 느껴지는 대답이다.


모든 사람은 유일하고 매우 특별하고 경이롭다.

피스토리우스의 대답에서 느껴지는 인간에 대한 존중은 헤르만 헤세의 서문에서도 느낄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일 뿐 아니라 세상의 현상들이 교차하는 유일하고 매우 특별하며 모든 면에서 중요하고 경이로운 지점이다. 세상의 현상들은 이 지점에서 반복 없이 단 한 번만 교차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중요하고 영원하며 신성하다.

우리는 공통된 근원인 어머니가 있고, 모두가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누구든 심연에서 던져진 하나의 시도이므로 저마다 고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각자가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다.

모든 사람은 유일하고 매우 특별하다. 심연에 던져진 하나의 시도이므로 저마다 고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각자가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다.


인간에 대해 그토록 알고 싶지만 결국 알 수 있는 건은 나 자신뿐이다. 우리는 어렴풋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뿐이다. 다른 이에 대해 어쩌면 이토록 겸손하고 사려 깊을 수 있는가.

우리는 때로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인양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바라보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 뿐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나의 시각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결과는 겸손함에 기반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길을 나아가야 한다.

작가는 여러 부분에 걸쳐 자신의 길을 나아가야 한다고 설파한다.

깨우침을 얻은 인간들에게 의무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아,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이 이끄는 곳이면 어디든 그 길을 따라 앞으로 더듬어 나아가는 것뿐, 그 외에 다른 의무는 절대, 절대, 절대로 없었다.

삶이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아, 그 길을 더듬어 나가는 것뿐이다.


모든 이에게 진정한 소명은 자신을 찾아가는 일 하나뿐이었다. 어떤 이가 결국 시인이나 광인, 예언자나 범죄자가 되더라도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끝에 가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가 관심을 둬야 할 일은 닥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운명을 찾는 것, 그 운명을 모두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미완성, 현실도피, 대중적 이상 속으로의 도주였고, 순응이었으며, 자기 내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진정한 소명은 자신을 찾아가는 일 하나뿐이다. 다른 모든 것은 미완성이고 두려움일 뿐이다.


나는 자연에 의해 미지의 세계, 어쩌면 새로운 시계나 무의 세계 속으로 던져진 존재였다. 이처럼 원시 깊은 곳으로부터 던져졌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내 안에 그 의지를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의지로 삼는 것, 그것만이 내 소명이었다.

나는 심연으로부터 던져진 존재이다. 이것을 느끼며 내면을 의지로 삼는 것이 소명이다.


정말로 자기 운명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어울릴 사람도 없이 완전히 혼자 남아 차가운 우주로만 둘러싸이게 돼요. 그것이 바로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지. 십자가에 기꺼이 못 박힌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영웅도 아니었고 자유로워지지도 못했소. 그들도 자신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원했고, 본보기로 삼는 대상을 가졌으며, 이상을 품고 있었던 거요. 오로지 운명만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본보기로 삼을 대상도 이상도 더는 없고 사랑과 편안함도 없어요! 그것이 실제로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지. 나나 당신 같은 사람들은 아주 고독하지만, 그래도 서로 의지하며 보통 사람과 다르며 반항적이고 특별한 것을 원한다는 것에 은밀한 만족을 느껴요. 하나 누군가 그 길을 끝까지 가고 싶다면 그런 것조차 떨쳐버려야 하겠지.

자기 운명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고독하다. 마치 예수처럼. 오로지 운명만을 따르는 사람은 편안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방구석 미술관>에서 읽었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그들은 외롭지만 자신의 신념대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나아감 속에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작품 속에 담아냈다.

내면의 목소리를 따른다는 것은 굉장히 큰 용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이미 본보기 삼을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예술가이던, 퇴사한 작가이던, 유럽에서 한인 민박을 연 사장님이던 말이다. 신념을 따르는 일이 원래 고독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기는 예상보다 두렵지 않다.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1.

그가 아프락사스. 선의 세계만이 아닌 선과 악 모두를 믿는다는 것


2.

오늘날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지 느끼는 사람은 많고, 그들은 그 덕분에 더 홀가분히 죽을 수 있다. 나 역시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죽을 것이다.

인간,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길은 고독하지만 그걸 알아야 삶을 홀가분히 끝낼 수 있다고 말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알아가는 그 투쟁이 끝난다면,

홀가분하게 이 세계로부터 날개를 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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