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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퐝지 Jul 21. 2019

노르웨이의 숲

우리는 어딘가 비틀어지고 망가졌어

대학 시절에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읽었을 때, 왜 이 책이 그리도 유명한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20대 후반이 되어버리고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읽었다. 사실 읽었다기보다는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퇴근 후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빨래를 개며- 귀를 쫑긋 세우고는 <노르웨이의 숲>을 들었다. 성우들의 나긋나긋한 보이스에는 감정이 절제된 듯 묘하게 살아있었다.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들을 수도 있구나.'

나의 속도대로 천천히 눌러 읽거나 때론 빠르게 스쳐갈 수는 없지만 책을 듣는 것도 그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활자가 내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소설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노르웨이의 숲>을 나눠 들었다.



우리 모두는 어딘가 비틀어지고 망가졌어


주인공인 와타나베, 그의 고등학교 시절 절친한 친구인 기즈키. 그러나 기즈키는 갑자기 자살해버렸고, 그의 여자 친구이자 와타나베와도 친구였던 나오코는 홀로 남는다.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로 인해 마음속 심연을 지니고 살아간다. 나오코는 기즈키뿐 아니라, 어린 시절에 친언니의 자살 직후 현장을 목격했다. 기즈키의 죽음 이후로는 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요양소에서 지내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와타나베의 선배이자 엄친아 같은 조건을 지녔지만, 타인에게 무심하고 이기심과 성취욕이 강한 나가사와.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갖추었지만 그도 어딘가 뒤틀려있다. 밤에 시부야로 나가 여자들과 자는 것을 놀이로 여기고 그를 사랑하는 애인에게도 딱히 마음을 주지 않는다. 그의 애인이자, 다른 여자를 만나거나 나쁜 행동을 해도 묵묵히 참고 기다렸던 하츠미. 하츠미는 해외로 파견 간 나가사와를 기다리다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2년 만에 자살해버린다.


나오코와 요양소 룸메이트인 레이코. 어릴 적 피아노 신동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신적인 이유로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되었다. 피아노 레슨을 하며 살아가지만, 레즈비언인 제자의 뒤틀린 행동으로 인해 힘들게 지켜왔던 가정을 포기하고 요양소로 들어간다.


모두들 어딘가 망가져 있다.

망가지고 뒤틀려있다.


기즈키가 왜 자살을 했는지, 다른 인물들은 왜 이렇게 뒤틀려있는지, 타인의 상실이 주는 고독과 허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리는지 공감이 되진 않았다.

마지막에 레이코와 와타나베가 굳이 그 행위를 통해서 서로를 위로하며 이해했어야 했는지는 매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이 소설이 이토록 유명한 이유는 읽기만, 아니 듣기만 해도 소설 속 인물들의 세상이 상상되도록 하는 하루키의 필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딘가 뒤틀리고 망가져버려서 공감하기 힘든 인물들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만들었다. 독자로 하여금 그들을 이해하고 싶고, 위로하고 싶게 하는 필력. 저마다 인물들이 가진 심연의 이유들을 창조해낸 상상력. 이런 작가들이 쓴 책을 읽으면, 그보다 나중에 태어나 그 글을 받아볼 수 있다는 걸 행운으로 여기게 된다. 엄청난 작가다.



책을 듣다가 귀에 쏙 들어온 문장이 있다.

봄날의 곰만큼 좋아

미도리가 와타나베가 자신을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말해보라고 했을 때의 대답이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라는 영화가 있었고, "봄날의 곰만큼 좋아"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는데 바로 이 대목이었구나 싶어서. 되게 반가웠다. 찾아보니 영화 제목이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의 영향을 받아서 지어진 게 맞았다.


또, 인상 깊었던 대목은 상실에 대한 부분이다.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죽음을 그리고 삶을 단순하게 파악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간 죽음은, 그때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열일곱 살 기즈키의 자살은 와타나베의 인생을 뒤틀어버릴 만큼의 큰 상실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남은 인생 동안 지니고 산다는 것은 치유되지 않는 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을 거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려서 손 쓸 수 없는 병.


책의 첫 장면에서 와타나베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고, 과거를 떠올린다. 상실의 시대를.

많이 아팠겠지만, 다 낫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의 상실의 시대는 지나갔고, 그가 살아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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