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원 Nov 15. 2023

일상으로의 회귀

일상 01

하필 오늘부터 흐르는 생각을 적는 곳이 다시 필요해졌다. 손목을 혹사시킨 죄로 더는 사각거리는 종이에 만년필 끝을 부딪히기 글렀다. 다른 의미로 잘 됐다. 글을 남기는 건 무슨 형태든 쓰레기는 되지 않으니 적어두었다가 나중에 하나씩 꺼내보고 싶을 때 꺼내보면 돼. 


나의 가을이 왔고 스물아홉이 됐다. 스물아홉 해 내리 겪은 계절인데도 이상하게 이번 해의 가을은 공기가 새롭다. 생일을 보내고 나니 감사할 일들이 많아 요새는 제법 고개를 구부정 수그리고 다니게 된다. 감사하다는 말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최근에 받은 선물 중 가장 기분 좋게 받았던 것은 작은 토토로 피규어 한 마리, 그리고 길 걷다 말고 냅다 끌려들어 간 올리브영에서 사 받은 립글로스 하나. 어느 선물이든 받으면 당연히 기분이야 좋지만 어째서인지 요새는 그저 소소한 것을 사랑하게 된다. 최근에 선물 받은 크로슬리 턴테이블 위에 늘 데이지 한 송이와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LP가 올라가 있다. 친구가 선물해 준 토토로 바이닐과 사비나에게 받을 스탄 게츠의 바이닐까지 넣어두려고 그럴듯한 턴테이블용 스탠드를 샀는데 어린 고양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질 못 해 안달이라 매번 덮어두기만 한다. 요새는 잠을 잘 때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바이닐 중 아무거나 켜놓고 잠들면 꿈에 그렇게 보고 싶은 얼굴이 자주 나와, 중독된 것처럼 같은 LP를 내리 들었다. 얼굴이 흐려질 일도 없어서 늘 선명하다. 아직도 덮지 못 한 액자 속에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으니까. 마른 스토크의 색이 갈색이 되었다. 평생 하얗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것도 예전, 지금은 저렇게 시간이 배인 것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요즘이다. 


몸이야 늘 말썽이지만 꾸준히 약도 먹고 밥도 먹었더니 버틸 만큼 튼튼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버릇이 더 잦아지고 태우는 담배는 양이 더 늘어났어도 그건 자연스럽게 없어질 버릇이라 생각하고 있어. 최근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생각을 털러 장례식이 있었던 부안의 본가에 따라갔다가 내소사에 들렀다. 그 사람에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멋있는 곳이었고 정말 정신없이 한참이나 주변을 돌았다. 날도 더운데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전나무 길이 아름다웠어. 잔풀들이 잔뜩 돋아나고 볕이 쏟아지는 초록빛 융단이 예뻤고,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고, 나는 생경한 것을 보는 어린아이마냥 불화니 사천왕이니 꼬리를 말고 걸어 다니는 고양이마저 신기해했다. 성현들이 나는 곳이라더니 서있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트이고 숨이 돌아서 오랜만에 얼굴에 생기가 돈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보는 친척들이 몇, 인사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가서 가고 싶었던 부둣가는 가지 못 했지만 전망대 같은 곳에서 바다를 구경하기도 했고, 조만간 다시 올 일이 생길 것 같아 마음에 담아두기만 했다. 이제 어디든 떠나고 싶으면 마음껏 떠나되 담아둘 것을 털어낼 준비를 하고 떠났다 시원하게 비우고 돌아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 세상은 넓고 걸어 못 갈 곳은 없다는 말이 왜 그렇게 위안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두운 밤에 눈부시게 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을 보다 보니 허한 속이 조금 채워지는 것 같았다. 외려 나를 모르는 이와 내가 모르는 것들에 둘러싸인 밤, 동이 트는 것도 모르고 책을 읽었다. 어릴 적의 부안이 생각나는 날이었다. 


약속이 잔뜩 밀려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났더니 조금 체력이 부족해졌지만 얼마 전 다시 시작한 필사나 유화 붓질이 나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심경을 이해하고 넘어선다. 그러니 넋이 나가지는 않았다.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고 많은 것이 변했다. 붙잡지 못하는 것이나 사랑하고 싶은 것을 계속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는 일은 없지만 여전히 그리운 상대를 머릿속에 욱여넣고 산다. 나와 닮은 그림자를 가졌지만 가장 닮지 않은 사람을 닳도록 마음속에서 끌어안고 쓰다듬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고, 가끔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엽서에 적어 내리느라 보내지도 못할 편지가 서른 장이 되었고, 채 주인에게 가지 못 하고 내 품에서 시든 꽃들이 수십 송이지만 그런대로 견뎌내는 것 같다. 이것도 쌓이다 보면 무뎌지나 보다. 나를 걱정한 친구의 손에 이끌려 멋쩍게도 점을 보러 간 날, 들은 말을 괘념치 않으려니 쉽지가 않다. 인연이 있음에도 운명은 자기 손으로 쓰는 것이라 내가 가진 내 운명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말이 그렇게 시큰거리더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살다가 2년이고 3년이고 못 잊어버리면 그때는 다른 수를 내어보자고 결론을 지었다. 그래도 여전히 기억을 뒤적여보면 아름다운 사람이라 아픈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너른 호숫가를 보며 울음을 그치지 못했던 나의 풋내기 같은 감정도 그 사람 앞이었기에 솔직할 수 있었다는 걸 알아. 그거면 되지 않았을까. 세상이 꼬박 태양을 돌아 어쩔 수 없이 지나치고 흐르는 것들이 있다. 벅찬 것들을 듣고 읽고 보면서 잔뜩 울어도 보고, 화도 내보고, 원망도 해보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 길을 걷다 우연찮게라도 만나게 되겠지. 


프로젝트를 끝내고 부트캠프에 온점을 찍었는데도 여전히 알 것도 할 것도 많다. 수많은 면접 제안과 기회를 거절하고 나를 키우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많은 일이 있었고, 그만큼 내게 쉼표라는 것이 생겼다. 전부 일상의 조각을 찾아주려던 과거의 나 덕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 나는 제법 완성형의 반구를 만들었고 앞으로 좀 더 살을 붙여 동그란 구를 만들겠지. 붙일 때에 쓸 끈끈한 풀은 아련히 머릿속을 잠식한 그리움과 애틋한 감정일 것이다. 오래된 기록들을 뒤적여보며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돌아오는 화요일에는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경주에 간다. 이틀뿐이지만 불멍이라는 걸 좀 때려보고 싶기도 했고, 가장 소중한 C의 생일인 겸 시간을 쪼갰다. 당분간은 시간이 여의치 않을 것 같아서 있는 힘껏 시간을 좀 소모해 보기로 했다. 사진도 많이 찍고, 글도 적고, 읽고 싶은 책을 파는 독립서점에 가서 책을 사고, 맛있는 걸 먹고 돌아오면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에 다시 파묻혀 내 일상을 보내게 될터다. 좋아하는 향기가 나는 이불에 파묻혀 늦은 밤까지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날이 내게 왔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기로 했어. 나를 할퀴지 않기로 했다는 뜻이다. 굶지만 않고 원하는 책을 잔뜩 읽고 푹신한 이불속에서 고양이들과 잘 살 수 있는 삶도 적당한 것만 같아. 고요한 곳에서 잠이 들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