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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Nov 15. 2023

거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날

일상 02


거하게 실패한 기분이 드는 날도 있고, 거하게 성공한 듯한 기분이 드는 날도 있는데, 어째서 거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날은 없는지 궁금증이 치민다. 언젠가부터 맘에 들지 않아 듣지 않았던 아티스트의 노랫소리는 오랜만에 눈물을 짓게 했고, 한참 시간이 지나 맛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던 오래된 김치는 좋은 김치찌개로 태어났고, 대학 시절이 생각나 오랜만에 사본 큐피 마요네즈는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참치마요에는 어울렸어. 실망한 얼굴로 마요네즈통을 들고 있었더니 지나가던 목소리가 ”왜 마요네즈 통을 들고 그렇게 시름에 잠겨있는데?”라고 물어보길래,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 마요네즈는 틀렸어. 그랬더니 쏠랑 다가와 그 마요네즈로 기가 막힌 참치마요를 만들어줬다.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입에 대어보니 이전에 학교 앞 도시락 집에서 사 먹던 그 츠나마요 맛이 났다. 두 번 생각할 일이라고 여겼다.


비가 많이 내렸고 세상이 차가운 바람에 잠겼다. 코 안이 시큰거리고 잘 때마다 숨 쉬기가 지치는 걸 보니 정말로 완연한 가을이다. 이맘때쯤 되면 늘 생각나는 작품이 하나 있어. 가시고기라는 소설인데, 드라마로도 보고 소설로도 읽고 만화로도 읽고 연극도 봤다. 주인공 남자애가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요양을 할 때에, 아버지가 떠나갈 때에, 어떤 여행을 갈 때에 매 순간이 가을 같이 보이는 작품이었다. 쓸쓸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안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본 내 탓인지, 가을만 되면 왜인지 대충 그려진 것 같던 만화 속의 낙엽과 바싹 마른 입술로 웃는 어린 남자애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한 채로 아이의 존재에 매달리고 있는 그 애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는 그 작품을 볼 때에 한참 어머니나 아버지의 떼지 못할 혹 같은 존재였어서 그랬는지, 그 남자애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생각하다가도 마른 남자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어느 한쪽도 응원할 수 없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 애가 죽으면 남자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리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듯해.


찢어지게 가난했다. 인복 좋은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돈을 얻어와 책을 사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그래서 가시고기 만화책을 정말 찢어질 때까지 읽었다. 그렇게 가시고기를 읽다가, 오랜만에 고시촌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보게 되면 나는 종종 “아빠, 내가 죽으면 아빠는 슬플까?” 하는 질문이 하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얼굴을 자주 볼 수도 없고, 돌아온 밤에 한적한 길을 걸으며 나는 코코아를, 아빠는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매주 기다렸다. 그런 순간에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 무엇보다 그 밤마다 마징가 제트나 철인 28호의 주제곡을 불러주거나 독수리 오 형제 중 그가 가장 좋아했던 독수리 켄, 못생긴 양동이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런 질문 따위를 건네면 어떤 표정이 돌아올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깡마른 남자가 늘 그 남자애를 볼 때 짓는,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릴까 겁나하는 그런 얼굴.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버릇처럼 내게 혼자 자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없어도, 그래서 더는 나를 지켜주지 못하게 되어도 혼자서 잘 버티고 잘 살 줄 알아야 한다고. 고작 일곱 살이어도 그의 삶이 고단한 것쯤은 알았다. 어쩌면 이 지독한 가을의 우울과 겨울의 허망함을 버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 아닐까 싶어. 당장이라도 모든 걸 놓고 떠나려 할 때 나를 붙잡을 사람이 더는 없어도 견뎌낼 방법을 찾으라는 것처럼. 병적으로 우울함에 시달리는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가끔 세상이 나를 두고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하고자 하는 일에 자신이 1그램이라도 없어지면 꼭 그런 불안함이 엄습한다. 지독한 완벽주의가 불러오는 발작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럴 때면 잔잔히 음악을 틀어놓고 다른 사람들의 글들을 읽는다. 특별한 것 없는 사람들의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읽고 있으면 그 안에서 내가 나를 들여다볼 기회가 많다. 어쩌면 당연한 아픔을 견디지 못해서 엄살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닐까 나를 호되게 혼내기도 하고, 가끔은 너무 익숙해진 아픔에 통증의 강도를 몰라 뒤늦게 나가떨어질 때가 있으니 종종 머리를 비우고 쉴 때도 있어야 한다고 다독이기도 한다. 요즘에는 후자가 더 잦다. 지친 얼굴을 하고 앉아있거나 지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타인의 눈에도 뻔히 보인다는 것을 이 나이 되어서야 알아버려서 꼿꼿하게 있다 보니 지치는 속도가 빨라져 버렸다. 덕택에 매 순간이 잔잔하게 지쳐있는 상태라… 내게 조금 쉼표를 주기 위해서 다독임도 가끔은 필요하겠더라는 결론.


이뤄지지도 못할 짝사랑을 길게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내가 하는 건 더 싫어하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런 꼴이 나버려서 그런 걸까. 그럼 그럴수록 잔잔하고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은 욕구에 흠뻑 젖어버린다. 어쩌면 얼굴을 가까이 대고 한참 밀린 잠을 몰아 잘 수 있었던 때를 떠올리다, 그 잔잔하고 고요하고 편안하던 낮과 바람에 이끌려 그런 식으로 그리움을 묻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무얼 하고 지내는지 쉽게 알지를 못한다는 건 정말 지겹고 싫은데도, 참. 괴랄한 감정이다.


그래도 나아진 점. 요새 예민하다는 말을 적게 듣는다. 시끄러운 소리나 커다란 소리를 들을 때 믿기지 않을 만큼 둔탁하고 메스꺼운 두통을 느끼던 것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물론 여전히 반갑지는 않은 소음들이 많지만 난데없이 길을 가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서서 귀를 막아야 하는 일은 줄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소리에는 여전히 민감하지만 그건 필요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다 보니 마음이 크게 쓰이지는 않는다. 많이 느려졌고, 많이 둔감해졌고, 많이 지쳤지만 많이 안정된 기분이다.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고 업무에 매달리게 되고 잠이 줄어들면 스트레스를 얻으며 또 똑같은 일이 생길 테지만 이제는 적당히 나를 조절하길 바라. 어쩌면 느낄 여유도 없을 고통에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던 것일 수도 있어.


가을 하늘이 아름답다.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사람도, 그 사람이 키우는 식물들도 볕이 좋고 뭉게구름이 적당히 뜬 맑은 하늘을 훨씬 더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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