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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Nov 15. 2023

입에 맞지 않는 쉬라즈는

일상 03

하루종일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젖혀보면 끝도없는 푸른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어. 유난히 당신이 생각나는 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멀지 않은 곳으로 산책을 나가 어딘가를 제법 거닐어보고 싶었으니까. 이름만 당신일 뿐 결국 내 계절의 흔적이 되어버린 당신이 그리웠다. 종이에 적어 몇 번이고 물 위로 던져버리고 싶었을 정도로. 할 일이 많았는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건 늘 반복되는 일상이다.


밤마다 어떤 주소를 적어 일상을 훔쳐보는 일과가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니 그 아이디 하나를 외우는게 별 것 아니었어서 무심결에 외워진거야. 간혹 내 머릿속을 강하게 흔들 글이 적혀있으면 당장이라도 기차표를 끊거나, 고속도로를 내달려 새벽이라도 그 곳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때가 제법 있었어. 아마 그 일기장의 주인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렇게 오래 떠나있지, 오래… … 아주 바쁘고, 정신없는 일이 쏟아진다 하였으니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득한 짐작만 남겨두고 나는 오늘도 별이 뜬 하늘을 본다. 온전히 검은색이 되지 못한 남색의 밤하늘이 얼굴 위로 쏟아질 것 같은 밤이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 일기장을 계속 들여다 보면서도 새삼 쓸데없는 버릇을 들였구나 싶었다. 당신이 원하는대로 나는 멀어졌는데 그럼에도 바보같이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고 한 번쯤 말해주고 싶어졌다.


가평의 지인에게 초대를 받았다. 고요한 곳에 가고 싶다는 내 노래를 언제 주워들었는지 할 일이 있다면 짐을 챙겨 주말 동안 내려와 있지 않겠냐는 제안에 거두절미 짐을 쌌다. 노트북, 핸드폰, 세면도구, 파자마, 충전기, 다이어리 겸 수첩과 펜. 새로 산 담배와 오래 쓰고있는 검은색 라이터를 대충 쑤셔넣은 게 전부였다. 그 곳에는 고양이들과 강아지들이 있고 종종 누군가가 아코디언 연주를 한다기에 나도 질 수 없어서 새로 산 블루투스 스피커를 챙긴 게 가장 특별하고 보잘 것 없는 성의.


도시를 떠나 있는 것은 소음과 번잡함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단점도 따라온다. 이걸 견딜 수 없어, 평생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골로 내려가 산다는 생각 자체가 내게는 절대적인 어불성설이다. 그냥 종종 별장에 가듯 놀러가서 밤하늘을 보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바디감이 있는 와인을 마실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할 것 같아. 


언젠가부터 까베르네 소비뇽보다 쉬라즈를 더 찾는다. 쉬라즈를 제대로 접하기 전까지는 내 취향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기억이 나는 그 시점부터 쉬라즈는 내게 착잡한 평온함이 되었다. 음미와 만족의 여유를 넘어서 쉬라즈라는 와인이 내 목을 타고 내려갈 때에 목줄기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망상들과 그리운 얼굴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라. 벗어날 생각은 없다. 앞으로도 까베르네 소비뇽보다는 쉬라즈를 더 많이 마시게 될테니까. 투핸즈 엔젤스 쉐어, 벨라스 가든, 몰리두커, 옐로우 테일… 그렇게 마시며 잔을 내려다보면 입에 맞지 않는데 마시는 건 아니냐던 물음이 귓가에 얹힌다. 그 질문에는, 아직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친구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10월이 조금 지난 수요일에 함께 위스키를 마시러 가자기에 약속을 잡았다. 워낙 일정이 정신없게 쏟아져서 그 약속을 이제서야 다이어리에 적어두는데, 문득 속이 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나 사람을 많이 만나고 내 할 일 남의 할 일 분간도 못 한채 시간을 보내는데도. 가을이 오니 더 그렇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공기가 가볍고 건조하고, 뜨뜻미지근한 조명을 켜두고, 이불을 덮지 않으면 살짝 추운 날씨. 봄밤과 가을밤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많아. 그래서 더 그런 모양이다.


내일은 가평에, 일요일은 돌아오자마자 선물을 사고, 또 내 할 일을 마저 해야한다. 다음주는 더 복잡하게 살아봐야지. 날 조금 더 채찍질 해봐야지,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을 허하게 가져가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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