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이 없다. 아침을 건너뛰었는데, 점심까지 그럴 수는 없다. 뱃속에서 신호를 보낸 지 한참이다. 일을 하도록 해줘야 하는데, 일감을 주지 않으면, 데모를 할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가족 친지에게 일감 몰아주기를 해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나와 한 몸인 위장에게 일감을 주지 않는 건 너무 인색한 짓이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된장국을 끓이기로 했다. 얼마 전 고향 친구 영에게 얻어온 배추도 네 포기나 있는데. 그래, 오늘은 ‘배추된장국’이다. 몇 겹으로 싼 종이를 푼다. 겉대를 깨끗하게 손질해 그대로 다 먹어도 될 것 같은 배추포기가 나온다. 앗! 아기 민달팽이 한 마리도. 어쩌나, 밖에 두면 얼 텐데. 그렇다고 내가 데리고 살 수도 없어, 망설이다 알아서 먹고 살라고 남아 있는 배추 포기 속에 넣어줬다. 달팽이도 먹고 나도 먹고 나눠 먹으면 될 테니까.
배추이파리를 적당하게 떼어 씻었다. 살림을 엉터리 방터리로 하는지라 그 흔한 멸치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그걸 사러 마트에 가랴 싶어 그냥 끓이기로 했다. 배추를 먼저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물을 약간 붓고 끊인다. 그러다 먹을 만큼 물을 붓고 된장을 풀었다. 대파와 양파를 넣은 후, 한소끔 끓이고 맛을 보니, 이게 웬일! 난 장금이가 환생한 것 아닐까. 무척 맛있다.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다. 시장해서 그럴 거라고 지레짐작하기 없기. 맛에 대한 것만큼은 내 미각을 믿는다. 어렸을 적부터 맛을 잘 안다는 말 많이 들었으니까.
이렇게 맛있는 된장국은 오랜만이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된장국이나 찌개는 언제나 맛있었는데. 그것을 먹어본 지 오래다. 그 맛과 결은 다르지만 맛있는 건 확실하다. 이상하다. 내가 장금이 환생이라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으나, 들어간 게 별로 없다. 배추이파리, 물, 된장, 대파, 양파, 마늘. 그게 다다. 그 흔한 멸치꽁다리 하나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된장 때문이렷다!
몇 년 전에 중학교 때 친구 ‘순’이가 보내준 된장이다. 예산에 살고 있는 순이는 나보다 세 살이나 많다. 늦게 학교에 들어왔던 순이. 추울 때는 나를 코트 안에 넣어 안고 쉬는 시간을 보냈고, 자취하는 집에 놀러 가면, 밥상을 맛있게 차려주었다. 그때도 된장찌개가 유난히 맛있었다. 그 순이가 어느 날 전화해서 주소를 물었다. 된장을 보내준다고. 수고스럽게 할 것 같아 염려되어 거절했더니, 다시마를 끓여 만든 아주 특별한 된장이라며, 재촉했다. 그렇게 우리 집으로 배달되었다.
분량이 많기도 했지만 식구가 단출한지라 된장이 줄지 않았다. 쌈장으로 만들어 먹었을 뿐 국을 끓인 건 처음이다. 국이나 찌개를 먹지 않은 지 오래다. 이유는 소금을 많이 먹게 될까봐서다. 그래도 오늘은 반찬이 없고 날씨도 추우니 된장국을 먹고 싶었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된장으로 이만큼 커온 사람들이니까.
밥과 된장국만으로 차린 소박한 밥상. 언젠가부터 밥상에 이것저것 놓기 귀찮았다. 반찬도 기본적인 것 외에는 원재료 그대로 먹는다. 당근, 오이, 고추, 파프리카를 그냥 먹거나 고추장에 찍어먹는다. 조리해서 먹다 남으면 버리기 일쑤고, 적은 양을 하자니 맛깔스럽지도 않다. 배추된장국은 소박하지만 새로운 음식이다. 맛있다. 처음엔 밥과 국을 따로 떠먹다가, 나중엔 말아먹었다. 따뜻한 밥과 국물이 들어가자 위장이 안심하나보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걸 보니. 식사가 끝난 지금, 열심히 일을 하리라. 땀이 촉촉하게 난다. 신진대사가 원활해진 것 같다.
위장이 놀랐을지 모르겠다. 새로운 일감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금세 적응하겠지. 오히려 반가울 거다. 예전에 일상이던 익숙한 일감이니. 어른들이 죽을 드실 때도 묽은 된장국과 함께 드시던 게 그래서일 거다. 익숙한 것이 편하다. 그것은 몸이나 마음이나 마찬가지다. 때로는 어떤 변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따라야 하지만 이렇게 익숙한 대로 하는 것도 괜찮은 일 같다.
배추된장국으로 배부르고, 몸 따뜻하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이제 글이나 쓰다가 햇볕 받으며 발밤발밤 걸어야겠다. 배추와 된장을 준 나의 두 친구, 영이와 순이를 생각하면서. 그러다 내키면 전화라도 한 통 하리라. 덕분에 장금이가 되었다고.